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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규 교수의 벼루이야기
  • 김한동 동부본부장
  • 등록 2022-11-25 01:34:06
  • 수정 2022-11-30 20:2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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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현대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우리나라 선조 문인들의 벼루에 대한 사랑
  • -영원한 친구에서 한평생 생사를 함께 하는 영원한 반려자로 지낼 것을 다짐하기도



이상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연명을 비롯한 벼루에 대한 문장들을 보면 우리는 과거 우리나라 선조 문인들의 벼루에 대한 사랑이 현대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매우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쉽게 느낄 수가 있다. 







벼루가 지닌 덕성에 대한 찬미와 흠모에서 시작하여 그것과 더불어 영원한 친구가 되고, 영원한 친구에서 한평생 생사를 함께 하는 영원한 반려자로 지낼 것을 다짐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위 이유원의 <예연명>의 경우와 같이 그것의 수명이 다하면 정성껏 땅에 묻어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단지 그것의 덕성에 대한 예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벼루의 덕성을 몸소 본받고자 노력하는 문인들의 자아성찰과 인격수양의 선비정신도 동시에 잘 반영되어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우리가 눈여겨 볼 인물이 조선 말기 선비문인이자 순국의사였던 황현이남규 선생이다. 이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선비정신이 투철했던 구한말의 마지막 선비의사라고 칭할 수 있는 인물인데, 모두 벼루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였다. 황현은 위의 인용문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산수유람을 하다가도 벼루의 재료로 사용될 돌을 발견하면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 벼루를 만들고 연명도 곧잘 새겨 남에게 선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남규 선생의 벼루에 대한 사랑은 더욱 각별하였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되게 할 수는 없다(士可殺, 不可辱)”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고 순국한 구한말의 걸출한 선비의사이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그러하지만 그는 벼루를 단순한 문방도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조상들의 덕을 기리고 공경하듯 조상들이 남긴 벼루를 마치 조상을 대하듯 공경히 대하였는데그의 마음속의 벼루는 이미 단순한 문방구가 아니라 고결한 덕성을 지닌 인격체로 간주되어 그 덕을 기리며 숭배하였다. 이는 그가 지은 다음의 연명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선조 아계공(鵝溪公 이산해(李山海))에게 큰 벼루가 있어 글씨를 쓰실 때에 이를 사용하곤 하셨다. 그런데 나중에 이것이 절도사(節度使) 조의현(趙儀顯)의 소유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청을 드려 이를 다시 사다가 우리 집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아성에 전하던 벼루가 조씨의 소유가 되었다네

 

그래서 이를 청해 찾아와 길이 보전하려 하노라


 바라노니 후손들이여 싫어 말고 잘 보중해서


 혹시라도 그르치는 일 없이 공경히 받들지어다


 태양이 남쪽 끝에 이른 계미년의 동짓날에 


 후손인 남규가 손모아 절하고 기록하노라.



(先祖鵝溪公有大硯。以供揮灑。後爲趙節度儀顯所藏。余躬請贖還。藏于家。銘曰。鵝城有硯趙氏藏。余丐以存圖永長。尙我後人寶無斁。敬奉罔墜如不克。尙章協洽日南至。後孫南珪拜手識.)-집에 전해 오는 큰 벼루에 대한 명(家傳大硯銘) 




 



인용문에서 보듯 그는 조상이 사용하던 벼루가 다른 자에게 넘어가자 마치 조상의 신주를 받들듯 백반으로 정성껏 되찾아와 집으로 모시고는 후손들에게도 그것을 공경히 받들지어다라고 당부까지 하였던 것이다. 벼루에 대한 그의 이러한 생각은 다음 연명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 벼루는 외할아버지께서 우리 어머니에게 주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 이름을 ‘구주(九疇)’라고 하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 모양이 마치 거북과 같아서 모가 졌으되 여덟 개의 모서리가 있으므로, 이것을 참작하여 상징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석 그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이 자연석 그대로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 가와 모서리의 길고 짧음이 서로 같지가 않으니, 이것을 보면 그 생긴 모양을 따라서 쪼아 다듬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로 이 벼루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집의 아이가 서재(書齋)를 수리하다가 흙 속에서 이를 다시 찾아내었다. 그래서 나는 너무나 기뻤다. 그러나 혹시 또 이를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겁이 났으므로, 나무를 다듬어 벼루의 갑()을 만들고 이를 엄하게 관리 보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다음과 같이 명(銘)을 한다. 




우물 정 글자처럼 구획이 아홉이라네 

 

그 모양이 거북을 닮았구나 


생긴 모습 그대로를 본뜬 것이니

 

이름을 억지로 지은 것이 아니라네


 외손자를 격려하는 사자 그림을 


마치 지금 새로 받은 듯하니 


장차 어찌하여 훌륭한 외손이 될까.




(硯外王父與吾先妣者也。何以名九疇。其軆如龜而方有八隅也。倣而象之也歟。自然也。何以知自然。方隅長短不齊。因其形而琢之也。先妣歿。不知硯所在。後十餘年。兒子治書齋。得於土中。余喜甚而愳其又失也。刳木而匣之。俾謹其藏。因爲之銘曰。井其疇龜其狀。象自然名非強。如獅畫新受貺。將奚修成宅相.)-구주연(九疇硯)에 대한 명(九疇硯銘)






 

그가 지은 이 <구주연(九疇硯)에 대한 명(九疇硯銘)>을 보면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남긴 벼루가 어머니의 사망으로 인해 행방불명되었다가 10여년이 지나 아들이 서재를 수리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되게 되자 너무 기뻐하며 다시는 소실되지 않도록 정성껏 벼루함을 만들고 또 그것에 대한 연명을 지었다. 그리고 그 연명에서도 그 벼루를 대하며 어떻게 하면 모친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훌륭한 자식이 될 것인가를 다짐하였다. 





이를 보면 이남규 선생의 조국에 대한 충성과 선비로서의 절개는 벼루에 대한 이런 지극한 사랑과 공경의 마음과 더불어 일치하고 양자(兩者)가 서로 어우러져 보완적으로 발전해나갔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해 그의 선비정신이 문방구로서의 최고의 덕성을 지닌 벼루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으며그 벼루는 그의 선비정신을 더욱 조장하고 북돋는데 한몫을 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벼루를 대하는 옛 문인들의 태도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군자의 덕을 흠모하는 선비문인들의 마음이 벼루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으며, 이런 선비문인들의 정신은 벼루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더욱 공고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뿌리 깊은 성리학적 분위기로 인해 완물상지(玩物喪志)라고 하여 물건에 대한 욕심을 엄격히 금하였지만 문인들의 벼루에 대한 욕심만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이는 벼루가 금은보화와 같은 세속적인 물건이 아니라 문방도구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 박은(朴誾, 1479~1504)이 지은 다음의 시를 읽어보면 이 점을 잘 알 수가 있다.





 

나는 욕심내지 않음을 보배로 삼으니

 

마음속에 한 물건도 걸림이 없네 


금과 구슬이 앞에 있어도 흙처럼 보니


보아도 못 본 체, 하물며 집어 던지리.


그런데 먹과 종이만은 무엇이 좋길래

 

나로 하여금 손에서 줄곧 못 놓게 하는지


마음에 욕망 있으면 다 청렴하지 못하나

 

이것들에 연연함은 벽이라 어쩔 수 없네


인생이 어리석거나 통달하거나 누가 누 없으리


어떤 이는 멋진 납극, 어떤 이는 시시한 장록


나의 백년지기 이택지는

 

기호가 서로 같은 막역한 친구 


그가 역수를 건너 유연에 갔다가

 

내게 한 덩이 검은 원벽을 선사하였네


벼루 열어 먼지 떨고도 아까워서 못 갈[磨]며

 

정규의 옛 솜씨를 아직도 생각하네


한 친구가 또 나의 애호를 알아


관지를 백 장이나 꿰어 보냈네


이조에서 조서 쓰던 나머지라고


책상에 펴 놓으니 눈보다 더 희네


이 두 물건이 속안에는 하치 않아도

 

고금에 좋아한 이는 속객 아닐세


 두 분의 마음씀이 고맙긴 하나


내가 과연 받을 만한 자격 있는가

 

이래로 요락하여 남산에 누워


읍취헌이 날마다 더 쓸쓸한데


막한 중 태현경 쓸 솜씨 없으나


문자의 추퇴와 격식은 아네


뉘 다시 내게 붓 한 자루 빌려 주어

 

내 평생의 속마음을 써 내게 할꼬






 

박은은 조선 전기 연산군 때의 문인으로 직언을 잘 고하던 대쪽 같은 선비기질로 인해 26세의 일기로 사형을 당한 선비였다. 





그는 이 시에서 약관을 겨우 넘긴 젊은 나이련만 금은보화와 같은 세속적 재물에 대한 탐욕이 전혀 없는 대신 문방구에 대한 욕심은 벽이라 고칠 수 없어 지니고 있음을 은근히 자랑하는(?) 듯한 어조로 읊조리고 있다. 





이처럼 문방도구에 대한 욕심은 청렴함을 생명으로 여기는 성리학적 선비들에게도 그리 금기시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오히려 이런 문방구에 대한 애착은 선비문인들로 하여금 세속적 관심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선비로서의 청렴함과 절개를 더욱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色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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