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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으로 간 성폭력
  • 임영희 편집국장
  • 등록 2023-03-10 08:2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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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성범죄 가해자는 어떻게 감형을 구매하는가




1. 성폭력 감형 패키지 팝니다!
– 피해자, 활동가, 변호사 인터뷰를 통해 분석한 성범죄 가해자 지원산업의 실태

‘반성문 2부, 탄원서 2부, 근절서약서 1부, 심리교육수료증(3일), 상담사의견서(3일), 소감문…’ 한 감형 컨설팅 업체가 만든 55만 원짜리 패키지 상품 구성이다. 방문이나 상담 없이 기계적으로 만들어지는 이 상품은 온라인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법정에서 성범죄 가해자의 감형 사유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피고인의 반성 및 뉘우침을 양형의 요소로 고려하는 관행으로 인해 감형 컨설팅 및 반성문 대필 업체가 난립했고, 가해자의 반성은 형식적으로 만들어진다.
이 같은 성범죄 가해자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 즉 ‘성범죄 가해자 지원산업’이 많은 이에게 충격을 주며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1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성범죄 가해자 전담법인과 가해자 온라인 커뮤니티, 감형 컨설팅 업체 등은 가해자를 위해 각종 감형 및 무죄 팁을 발명하며 법조계에서 거대한 산업을 구축했다. 몇몇 법인은 전직 대법관·대학 총장·부장판사·검사 등 고위 인사를 자문위원으로 임명하고 한 달 홍보비를 1억 원 이상 쓰는 등 네트워크와 자본을 축적하며 성장 중이다. 이 책은 이러한 현실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폭력 피해자·여성단체 활동가·변호사 심층 인터뷰와 현장 연구를 통해 성범죄 가해자 지원산업이 어떻게 등장하고 확장했는지, 가해자 지원산업으로 인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속에서 성폭력 담론이 어떻게 재구성되었는지를 여러 측면에서 고찰한다.

어느 날, 나는 지하철 교대역에 게시되었다는 한 법무법인의 광고를 보고 아연질색했다. ‘아동성추행, 강간 범죄, 기타 성범죄’ 등에 대한 ‘부당한 처벌을 무죄, 불기소, 집행유예로 이끕니다’라는 내용의 광고였다. (중략) 해당 광고판은 당시 여러 시민의 문제제기로 철거되었지만, ‘가해자 전담변호사 시장’, 이른바 가해자 중심의 ‘성범죄 전담법인’이 형성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즈음 인터넷에 성폭력을 검색하면 법인들은 ‘성범죄 전담/전문변호사’, ‘무혐의, 무죄 받아드립니다’, 심지어 ‘무고 전문’ 등의 문구를 온/오프라인에 홍보했고, 패키지 상품과 같은 형태로 가해자 방어와 (역)고소 건수를 늘려가고 있었다. 스스로를 성범죄 전담법인이라 자처하는 법인들의 홈페이지에는 해당 법인의 변호사를 선임하여 성폭력 가해자가 무죄를 받거나 낮은 형량을 받았다는 후기가 ‘성공 사례’라는 이름으로 게시되어 있고, 일부 법인은 자신들을 ‘성폭력 상담소’라고 소개하기까지 했다. 성폭력 가해자의 법적 대응 과정은 수임료가 높더라도 승소율이 높고 성공 후기가 풍부한 업체를 선택하면 이길 수 있는 것으로 시장화되고 있었고, 법조 시장에서 성폭력 가해자 변호는 그 어느 범죄보다 돈이 되는 분야로 선호되고 있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6~7쪽)

2. 꼼수 감형이 오염시킨 성범죄 재판의 풍경
– 헌혈, 정신과 치료, 고도비만 등 납득할 수 없는 감형 사유와 역고소 전략

성범죄 가해자 전담법인의 감형 및 무죄 전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들은 성범죄 양형의 감경요소 중 “진지한 반성”에 주목하여 ‘감형을 위한’ 반성을 만들어냈다. 대표적 방법은 반성을 명목으로 사회봉사단체나 여성단체에 후원금을 기부한 후 영수증을 법원에 제출하는 것이다. 후원금 기부는 성범죄 가해자들이 감형 꼼수로 널리 사용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최근 여성단체들은 기부하는 사람이 누구이고 이유가 무엇인지를 꼭 확인한다. 또한 가해자 전담법인은 “사회적 유대관계 분명”이라는 성범죄 집행유예 기준에 착안하여 가해자가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주장하고, 가족과 지인의 탄원서를 활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가해자 측이 재판부에 제출하는 자료는 봉사활동, 헌혈, 직장 해고, 정신과 치료, 음주 치료, 고도비만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꼼수 감형’은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며,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꼼수 감형 등 가해자 지원 시장의 거래가 성범죄 가해자를 법시장의 합리적 소비자로 탈바꿈시킨다는 점이다. 가해자는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문가에게 법적 정보와 서비스를 구매하는데, 이는 시장원리에 맞는 합리적 행위로 용인된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 전담법인의 전략에 따라 가해자가 피해자를 비롯하여 피해자 가족 및 지인을 명예훼손 등으로 역고소하기도 한다. 기획된 역고소는 사건 해결을 위한 피해자의 의지를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성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예훼손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뒤바꿔버린다. 이 같은 상황에서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대응하기 위해 자신의 자원과 역량을 소모할 수밖에 없다. 성범죄 재판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이라기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경쟁하고 자본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투쟁의 과정으로 전락한 것이다.

최근 여성운동단체들은 가해자들의 감형 전략과 홍역을 치르고 있다. 반성의 일환으로 재판부에 내기 위한 후원금 납부와 회원가입이 증가했고, 가해자임을 숨긴 채 자원활동을 신청하거나, 자원활동가로 활동하는 남성이 재판 중인 가해자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이처럼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리고 피해자들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이러한 방식들이 가해자의 감경요소로 적용되는 관례로 인해 단체들은 후원회원 가입이나 기부 시 어떠한 이유와 경로로 이루어진 것인지 더욱 꼼꼼하게 살펴보게 되었다. 후원회원이나 기부자에게 환영과 감사가 아닌 의심과 검열의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8쪽)

위의 판결문들에는 반성문, 기부, 자원봉사, 장기기증 서약, 성폭력 예방교육 이수뿐만 아니라 피고인의 지인, 직장동료들과 가족, 여자친구의 선처 요구 및 탄원,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 등이 유리한 정상으로 언급되고 있다. 특히 한 판결의 경우 피고인은 피해자와 합의하거나 용서받지 못했지만, 가족과 지인 들의 재범방지 다짐, 피고인 누나의 단체 기부가 감경사유로 인정되었다. 성폭력의 법적 해결 과정에서 피해자가 합의에 응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가해자의 감형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판결들은 합의에 대한 피해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심지어 피해자가 합의를 거절한 경우에도 가해자의 “사회적 유대관계” 및 다른 사유들로 형을 낮췄다. 이것은 성폭력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 처벌에 대한 피해자의 의사가 고려되지 않고 있으며, 억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사유들로도 가해자가 충분히 감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Chapter 2 힘드시죠? 감형 컨설팅 해드립니다〉 중에서(107~108쪽)

성범죄 전담법인이 운영하는 온라인 카페와 법적 정보의 상품화 및 산업화되는 전문가 조력을 통해 성폭력 가해자들은 법시장에서의 합리적 소비자로 이동함으로써 성폭력은 경제적인 것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성폭력의 법적 해결 과정은 성폭력이 발생하는 기반인 성별권력과 성폭력을 용인하고 사소화하는 남성중심적 사회에 대한 투쟁의 과정이다. 그러나 수사·재판 과정에서 가해자에게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법적 정보의 판매와 전문성의 상품화는 성폭력이라는 정치 투쟁의 장 자체를 자본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문제로 전환시킨다. (중략) 신자유주의 통치는 시장원리를 통해 쉽게 조작 가능하고 통치 가능한 주체, 즉 시장원리를 내면화한 주체를 만들어내면서, 공공성, 윤리, 책임의 가치를 삭제하고 있다. 이처럼 소비자로서의 가해자와 시장화된 성범죄 전담법인, 그리고 산업화되는 전문가 그룹 들이 가해자 카르텔을 구성하면서 성폭력은 점차 정치적인 것에서 경제적인 것으로 이동하고 있다.
- 〈Chapter 2 힘드시죠? 감형 컨설팅 해드립니다〉 중에서(138쪽)

3. 재판에서 피해자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 책임논리를 넘어, 피해자가 주체가 되는 법적 공간을 꿈꾸다

성범죄 가해자가 법시장의 합리적 소비자로 이동하는 사이에 피해자의 위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가해자 전담법인의 전략이 성범죄 판례들을 오염시키고 법적 판단 기준을 바꾸는 동안 가해자의 억울함에 과잉 공감하며 피해자를 의심하는 태도는 점차 확산되었다. 저자는 이 같은 흐름에서 성별권력 문제는 외면한 채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새로운 피해자 담론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예컨대 충분히 주체성이 있으면서 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았는지,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았으면서 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는지를 피해자에게 묻는 식이다. 또한 의심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피해자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고통을 내세우고 피해자다운 모습만을 드러내야 한다. 이는 한국의 사법 절차, 나아가 우리 사회가 여전히 피해자를 편견에 찬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법정에서 또 사회에서 피해자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희(피해자): 사실 그렇잖아요. 아무리 아픈 사람이어도 계속 아파 보이는 게 아니라 멀쩡해 보일 때도 있고 아파 보일 때도 있듯이, 피해 입은 사람도 똑같잖아요. 피해 입은 게 불현듯 찾아올 때도 있고 잊어버릴 때도 있는데, 맨날 생각하면 죽어요. 근데 검찰 조사 때는 항상 (아픔을) 끄집어내야 그쪽에서 믿어주니까 울지 않으면 안 돼요. 검찰, 경찰 조사 때 안 울면 뭐지 하는 눈빛으로 쳐다봐요. 그러면서 질문이 점점 세져요. 그게 제가 깨달은 것 중 하나예요. 아 조사 때 피해자는 울어야 되는구나. 저는 제가 만나는 피해자들이 경찰 조사를 아직 안 받았다면 울라고 해요. 안 울고 싶어도 울라고. 근데 솔직히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 사람은 계속 아픈데, 경찰서에서 울어가지고 제대로 조사가 되지도 않고, 제가 봤을 때는 하나의 쇼 같아요.
- 〈Chapter 3 성폭력 피해자, 법정에 서다〉 중에서(175~176쪽)

지난 몇 년간 한국의 미투운동에서 목도한 것과 같이 더 이상 피해자들은 성폭력 피해를 수치스럽거나 숨겨야 할 것으로만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말하고, 요구할 때 그 과정을 통해 힘을 얻었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는데, 피해자들은 싸우는 주체로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자신과 지지자의 재판을 모니터링하면서 법적 공간을 투쟁의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피해자들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데, 현재 피해자에 대한 법적 권리 보장의 내용들은 피해자의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체계가 부족한 편이다. 따라서 일본, 독일 등 일부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피해자참가제도 등을 검토하여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직접 질문하고 가해자의 책임을 추궁할 수 있게 함으로써 말하는 주체의 위치로 피해자를 이동시킬 필요가 있다.
- 〈Chapter 5 ‘성폭력 정치’의 재구성을 위한 제안〉 중에서(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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