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서(蔭敍)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도 관리가 될 수 있었던 제도이다. 즉 5품 이상 관리의 비속(卑屬) 친인척에게 시험 없이 하급 관직을 주는 관리 임용 제도로 주로 공을 세웠거나 높은 벼슬을 하는 귀족이나 양반 자손들이 이 제도의 혜택을 봤다. 음보(蔭補), 문음(門蔭), 음사(蔭仕), 음직(蔭職), 음덕(蔭德)이라고도 한다. 음서로 선발된 관료는 음관(蔭官)으로 불렀다.
중국 위진남북조 시절 문벌귀족에게 구품관인법이 있었다면 고려의 문벌귀족에게는 음서가 있었다. 공음전과 함께 문벌귀족 형성의 결정적인 요인이자 상징이었다.
공음전이 귀족의 수조권을 보장함으로써 귀족들의 경제적 기득권을 보장했다면, 음서는 문벌귀족 관직의 세습을 통해 정치적 기득권을 합법적으로 보장해주는 제도였다. 삼한 공신의 자손들을 후대하라는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기반으로, 당나라와 송나라의 음보 제도를 들여와서 5품 이상 관료의 비속(卑屬)에게 관직을 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대상 범위는 아들, 손자, 외손자, 사위다. 요즘 같으면 아버지나 아버지의 친인척, 혹은 어머니의 친인척, 또는 삼촌, 장인 등이 고위 공직자이면 태어날 때부터 놀고먹어도 공무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려 제4대 임금인 광종은 과거 제도를 통해 공평하고 공정하게 관리를 뽑도록 했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임금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인물을 등용해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여전히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도 관리가 되는 방법이 있었다. 조상이 높은 관직에 있었거나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경우, 그 자손들에게 관직을 주었으니 앞서 말한 음서이다.
음서는 고려 제7대 임금인 목종이 997년에 처음으로 실시했다. 음서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관리는 5품 이상이었다. 원칙적으로 장자에게만 적용했으나 예외도 많았다. 제11대 임금인 문종 때는 관직뿐 아니라 대대로 소유할 수 있는 땅인 공음전도 주었다. 이로 인해 고려는 부와 권력이 일부 귀족들에게 집중되고, 대대로 세습되는 사회가 되었다. 특히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몇몇 힘 있는 가문들의 힘이 더욱 세지면서 문벌 귀족이 나타났다.
음서 제도는 조선 시대에 와서도 계속되었지만, 고려 때와 비교해 혜택을 받는 범위는 크게 줄어들었다.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공신이나 2품 또는 3품 이상 관리의 자손만이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될 수 있었으며, 음서를 통해 올라갈 수 있는 관직의 등급도 한계가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 제도가 강화되면서 핏줄이나 집안보다는 실력을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각설하고, 위에 언급한 음서 제도가 현재 우리네 삶 속에서도 재현될 전망이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민주화운동 관련자'의 유족 또는 가족에 대해 교육·취업·의료·양육 지원 등을 제공하는 내용을 담은 '민주 유공자법'을 재추진하면서 여야 간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우원식 민주당 의원은 "현재 이한열·박종철·전태일 열사가 모두 유공자가 아니어서, 이들을 유공자로 인정해달라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국민의힘이 "운동권의 셀프 특혜"라며 여전히 반발하고 있어 여론전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우 의원은 최근 한 언론매체와의 통화에서 "저번에 셀프 보상법이라는 비판을 받은 법안과 이번에 재추진하는 법안은 다르다"라고 하면서 "지난번에 추진됐던 민주화보상법은 구속되고 해직된 사람까지 포함되는, 범위를 넓게 잡은 법안이라면 이번에는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에게 한정되는 법"이라고 설명했다.
우 의원은 "과거 추진되던 법안은 철회됐고 내가 낸 법안만 남았는데, 대한민국이 이만큼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나라가 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친 사람을 유공자로 보호해주는 것을 못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라며 "이한열·박종철이 아직 민주유공자가 아닌 게 말이 되느냐, 유가족들이 국회 앞에서 400일가량 농성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 법안이 통과되면 농성도 풀어주십사 하는 요청을 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앞서 지난 2020년에도 민주화 유공자법을 추진했으나 셀프 보상이라는 여론의 비판을 맞은 끝에 법안을 철회했다.
우상호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도 "민주화 유공자법 대상은 가장 넓게 잡아야 830명 정도이고, 정부 추산으로도 최대로 잡아서 1년에 10억 원이 든다고 계산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여권이 침소봉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라고 했다. 민주당은 특혜 소지가 있는 조항을 삭제하고서라도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며 벼르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운동권 인사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이미 충분히 이뤄졌다’라는 입장이다.
정미경 최고위원은 최근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화 유공자예우법에서 눈에 띄는 내용을 보면 자녀들에게 의료비, 교육비 등을 지원하고 대학입학, 편입 혜택과 취업 때 10% 가산점을 준다고 한다."라면서 "우 위원장은 '명예회복을 위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미 우리 국민은 선거에서 운동권 인사를 뽑아 국회의원도 시켜주고, 시장·군수·도지사도 시켜주는 등 운동권 인사들에게 명예를 회복시켜준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어 "제 부친은 월남전 참전용사였고 아내를 잃고도 엄마 없는 아이들을 조국에 남겨둔 채 전쟁터에 가셨던 분"이라며 "평생을 고엽제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고, 그분의 자녀인 저도 힘들게 살았으나 국가나 정부로부터 어떤 지원이나 어떤 특혜도 받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정 최고위원은 "지금 국회가 월남전 참전용사들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것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민주당의 운동권 인사 자녀들에게 특혜를 주는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것에 대해 이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라며 "분노하시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처럼 법안에서 쟁점이 되는 부분은 '셀프 보상'과 공정성 논란이다. 법 제정에 반대하는 이들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의원들이 직접 혜택을 보기 위해 법안을 추진한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민주화 유공자법 제정안에 가족에 대한 학비 면제·취업에 따른 가산점까지 부여한다고 되어 있어 형평성을 해친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제정안에 따르면 민주화 유공자의 배우자 또는 자녀에겐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등의 수업료가 전액 면제되며, 공·사기업 취업 희망 시 유공자와의 관계에 따라 만점의 5% 또는 10% 가산점을 받는다.
이에 국민의힘은 입시·채용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내용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민주당의 조국(전 법무부 장관) 사태 반성은 불법 특혜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아예 특혜를 법으로 만들어버리자는 것"이라며 "합법적 '조국'이 되려는 시도를 멈추라"라고 비판했다.
네티즌들의 반대여론도 뜨겁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지난 9일 페이스북에서 “ 민주화운동 관련 유공자예우법은 그것이야말로 외려 민주화운동에 대한 모독”이라고 지적하며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국가로부터 피해를 받았으면, 배상소송을 통해서 받아내면 그만”이라며 “이미 법까지 만들어져 다 배상을 받은 것으로 아는데, 뭐가 부족해서 왜 그 자녀들까지 입시나 취업에서 특혜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썼다.
진 전 교수는 이어 “고작 자기 자식이 남의 자식에게 갈 기회 빼앗아 특혜를 누리는 사회를 만들려고 민주화운동 한 것이냐”라며 “민주화운동은 평등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만들려고 한 것이지 자녀에게 예외적 지위를 주기 위해 한 게 아니잖냐”라고 꼬집었다.
“민주화는 모든 국민이 함께 이뤄낸 것이지 운동권이 이룬 것이 아니다.”, “대학 때 몇 년 학생운동 경력으로 국회의원 된 자들이 특혜 세습까지 하겠다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라는 등 네티즌들의 비판도 쏟아졌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 같은 논란들에 앞서 지난해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던 어느 민주화 유공자의 성찰이 무엇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와 다시금 되새김해 본다.
“민주화운동 과정에는 수많은 국민의 피와 눈물이 있었다. 저와 제 아내는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러운 사람으로 유공자로 우대받을 자격이 없다.”
지난해 4월 초, 어느 날 아침에 전해진 김영환 충북지사의 고백은 많은 이를 숙연케 했다.
그는 지난해 3월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민주화 유공자 가족을 지원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하자 강하게 비판하며 유공자 지위 반납을 예고했다. 얼마 후 설 의원이 법안을 철회했지만 “특혜를 누리려고 민주화운동에 나선 것이냐”라는 비판 여론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도덕성과 공정을 내세웠던 문 정권 인사들의 불공정한 행태에 질린 이들 사이에서 “문 정권은 위선적”이라는 인식이 확산했던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김 지사는 지난해 4월 초, 페이스북에 “지금 광주민주화운동 증서와 명패를 반납하러 간다.”라며 자신과 아내의 유공자 증서 사진을 올린 뒤 이날 반납 절차를 마쳤다. 유신 반대로 연세대 재학 중 옥고를 치른 김 지사는 이후 아내와 함께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됐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 부부가 함께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김 지사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예우나 지원이 국민의 짐이 되고 있다. 우리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할 때는 결코 이런 보상을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었다”라며 “4·19혁명에 참여한 국민, 광주민주화운동 때 고통을 당한 시민, 6월 항쟁에 동참한 온 국민이 유공자”라고 밝혔다. 이어 “작금의 민주화 퇴행, 부패 만연, 특권과 반칙의 부활을 지켜보면서 과거 민주화운동 동지들의 위선과 변신에 깊은 분노와 연민의 마음도 갖게 됐다”라고 덧붙였다.
설훈 의원 등 당시 범여권 의원 73명은 지난해 3월 민주화 유공자 가족 등에게 교육·취업·의료·주택 지원을 하는 내용의 ‘민주화 유공자예우법’을 발의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받고 철회했다. 이 과정에 제대로 된 사과나 유감 표명은 없었다.
이미 문재인 정부에서 정치·사회·경제적으로 큰 이익과 혜택을 누리고 있던, 586세대로 상징되는 민주화 유공자들이 가족마저 예우받게 하려는 데에 많은 이가 분노했다. 김 지사의 말대로 지금 우리가 이룬 민주화의 ‘공’이 일부 인사나 특정 세력이 아닌, ‘국민 모두에게 있다’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 민주화로 가는 주요 고비마다 민주화 세력을 돕고 이들에게 힘을 실은 건 평범한 국민이었다. 1987년 6·10항쟁 때 시위대에 물과 빵과 박수를 보냈던 넥타이 부대, 2016년 촛불시위 때 아이와 함께 촛불을 들었던 유모차 부대가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민주화 유공자를 자처하며 각종 특혜와 예우를 요구하지 않는다.
왜 늘 부끄러움은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아닌, 김 지사처럼 부끄러움을 아는 이들의 몫이어야 하나. 지금이라도 비뚤어진 선민의식을 버리고 겸손한 모습을 보인다면 민주화 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는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2022년 6월 현재 청년실업률은 6.9%, 청년실업자 수는 30만 명에 이르고 있다.
가뜩이나 장기간 계속되는 경기침체로 인해 고학력 청년들의 실업난이 이처럼 급증하고 있는데 이들에게서 공정, 공평한 취업기회를 박탈하는 이중고를 겪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주화 유공자 자녀들에게 의료비, 교육비 등을 지원하고 대학입학, 편입 혜택과 취업 때 10% 가산점을 준다면 여타 일반 국민의 자녀들은 취학과 취업 시 상대적으로 불공정, 불공평한 입장일 수밖에 없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미래 세대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줄 수 있는 현대판 음서 제도의 부활에 곱잖은 시선이 적지 않음을 정치권은 결코 간과해선 아니 된다. 부디 자중하길 간곡히 당부드린다.
그리고 우원식 의원에게 묻는다. 4·19혁명, 부마사태, 6·10항쟁 등 역사에 점철된 수많은 민주화 역정에서 앞장선 몇몇 이들만으로 민주화가 이뤄졌겠느냐고 묻고 싶다. 또 그 과정에서 당신들과 달리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고 스러져간 많은 국민이 이한열·박종철보다 희생이 모자라며, 그리고 그 가족들의 아픔과 고통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싶다. 더불어 대다수 국민적 지지 없이 이 모든 것들이 진행됐겠느냐고 묻고 싶다.
만약에 끝내 이 법안의 통과를 고집하려거든 먼저 이들부터 밝혀내 민주화 유공자로 지정하길 촉구한다.
아울러 차제에 우 의원이든 누구든, 무슨 일이건 간에 제발 미리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국민 눈높이에 맞게 추진하길 강력하게 경고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