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활약상으로 널리 알려진 암행어사로는 박문수가 대표적이다.
박문수처럼 유명하진 않았으나 그에 못잖게 탐관오리들의 저승사자였던 암행어사가 있었으니 서승보(徐承輔)라는 이다.
충청우도 어사 서승보는 1857년(철종 8년), 충청도 홍산에서 백성들을 수탈하고 사소한 빌미로 어린아이를 장기수감한 전임 홍산군수이자 좌수사였던 김기석을 탄핵했다.
김기석은 군수 재임 시절, 관청 건물을 보수하고 중건할 때 거액을 빼돌려 자기 주머니를 부풀렸다. 또 매관매직은 물론 빼앗다시피 걷어 들인 기부금 260냥도 횡령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무능한 사람에게 고을 관직을 팔거나 멀쩡한 장정을 군역에서 면제해준 대가로 450금의 돈도 착복했다.
게다가 자신의 처가 쪽 산소를 찾았다가 주변 소나무의 껍질이 벗겨진 것을 보고 대로하여 마침 산에 땔감을 하러 간 어린아이를 범인으로 몰아 장기간 감옥에 가두고 방임했다.
당시 춘궁기에 백성들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는 것은 다반사였는데 자신의 학정은 생각하지 않고 애꿎은 어린아이를 죄인으로 몬 것이다.
열 살짜리 아이를 가둔 것도 비난받을 일이지만, 소나무 껍질을 벗겼다는 증거도 없으니 재판을 하거나 곤장을 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돌려보내면 자신의 체면이 손상될까 염려돼 그대로 가둬 둔 것이다.
몇 달이나 감옥에 갇혀있던 어린아이는 결국 김기석의 임기가 끝나고 새로운 군수가 온 다음에야 풀려났으나 이미 정신이 온전치 못하고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상태였다.
김기석이 비록 임기가 끝나기는 했으나 천인공노할 죄인이기에 어사 서승보는 한양으로 상경하자마자 좌수사 김기석에게 벌을 줄 것을 철종께 청했다.
서승보는 탐관오리였던 태안군수 오치영도 징치(懲治)했다.
서승보가 안면도를 찾아 어느 어부의 집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그물 칠 자리를 양반에게 뺏겨 한탄하는 어부에게 서승보는 ‘왜 관아에 고변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어부는 ‘군수에게 뇌물 줄 돈이 없어 소송은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한다.’라고 탄식했다.
즉 군수가 뇌물을 받고 재판을 처리한다는 것이다. 또 이로 인해 군수가 챙긴 돈이 수천 냥에 이를 뿐만 아니라 뇌물을 바치지 않아 고문과 매질로 망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일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서승보는 뒷산 송림을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송림은 먼바다에서 바라볼 때와는 달리 여기저기 파인 데다 베어진 나무 둥치가 많았다.
안면도는 당시 조선반도에서 제주도와 거제도 다음으로 큰 섬인데, 이곳 송림은 곧고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서 나라에서 벌목을 금지한 지역이었다.
서승보는 다시 어부의 집을 찾아 ‘누가 이리도 무도하게 나무를 함부로 베어냈느냐?’라고 물었다.
어부는 ‘군수가 해마다 벌목한 소나무로 목재를 만들어 서울의 본가로 수송했으며 공관을 수리하고 보수한다는 핑계로 사유림의 나무까지 헐값에 사서 강제로 가져갔다’라고 대답했다.
또 이렇게 가져간 나무로 수십 칸의 집을 지을 수 있는 목재를 만들고 기와 수천 장을 구워 읍내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아흔아홉 칸 기와집을 지었다는 소문이 떠돈다고 덧붙였다.
서승보는 그날 낮 태안 읍성에 출두해 형방과 공방의 문서를 가져오게 하는 등 증거를 찾고자 관아를 샅샅이 뒤지게 했다.
그러나 워낙 치밀하게 서류정리를 해놓은 터라 쉽사리 비리 물증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군수 오치영은 자신의 잘못을 결코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철면피한 오치영도 벌목 금지된 소나무를 베어서 지은 아흔아홉 칸 기와집까지 숨길 수는 없어 결국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이처럼 가는 곳마다 탐관오리를 색출해 백성들의 환호를 받던 그이기에 당시 비리에 연루된 관리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오금을 펴지 못했다.
1814년 공조판서를 지낸 서유여의 아들로 태어난 서승보는 33살이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고 얼마 후 충청우도 암행어사에 임명됐다.
충청도 암행을 마치고 돌아온 서승보는 곧바로 승지가 되었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조참의와 예조참판, 예문관 제학에 이어 홍문관 제학을 거쳤다.
성품이 청렴결백했던 그는 학식과 문벌이 높고 강직한 사람에게 제수하던 규장각이나 홍문관 관리 등 청환직(淸宦職)에 임명됐다. 1875년 이조참판이 되었고 다음 해 한성부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며 1877년 6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 탐관오리들에게 저승사자로 불리던 서승보는 여전히 부정과 비리가 횡행하는 요즘 공직사회에 꼭 필요한 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횡령, 학대 등으로 논란이 일고 있는 안동지역 장애인 거주 시설 ‘선산재활원’사건은 다른 시각에서 보면 공무원들이 일을 키운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설에서 장기간 거주자 폭행, 임금착취 등 학대와 비리가 저질러지고 있었으나 관리 감독을 해야 할 안동시나 경북도, 복지부에선 단 한 번도 이 같은 비행을 막지 못했다.
우선 직접적 관리 감독기관인 안동시는 선산재활원 설립 이후 18년간 해마다 몇 차례 점검에 나섰음에도 학대와 횡령을 적발하지 못했다.
경북도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까지 경북 지역에서 드러난 학대 행위 발생 시설 수는 경산 성락원, 영덕 사랑마을 등 모두 25개소에 이른다.
그러나 장애인단체 관계자에 따르면 그동안 경북도가 법인 해산명령을 내리거나 비리 이사진을 전원 해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복지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복지부는 3년에 한 번씩 전국에 있는 장애인 거주 시설을 평가한다. 가장 최근 평가인 2019년 평가 결과, 선산재활원은 평균 B등급의 후한 점수를 받았다. ‘이용자 권리’는 무려 A등급이었다. 중앙정부 또한 선산재활원의 학대, 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뭣보다 대체 어떻게 이 같은 평가가 나올 수 있었는지가 너무 궁금하다.
무려 18여 년 동안 시설에서 폭력이 행사되고 장애인의 임금을 착취하는 비리가 버젓이 저질러지고 있었는데도 적발은커녕 높은 등급이 매겨지고 있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뿐만이 아니다. 시설폐쇄라는 행정 명령을 내리고도 안동시는 거주인 지원계획을 탈시설과는 다른 방향으로 고집하고 있다.
장애인 거주 시설을 폐쇄하고, 해당 시설 이용자를 원 가정 혹은 다른 시설에 보내거나 신규 시설을 지어 수용한다는 계획을 세우는 등 또 다른 논란을 낳고 있다.
안동시는 최근 장기간 학대가 일어난 선산재활원을 폐쇄한 후 거주인의 원 가정 복귀, 탈시설화 추진, 공동생활가정 신규 시설 설치, 타 시설 전원 조치 등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탈시설화 추진’의 경우 ‘임대주택 지원’ 외에 별다른 탈시설 지원 정책이 있는지 등에 대해선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장애인단체 등 관련 시민단체들은 탈시설 원칙과 동떨어진 안동시 조치를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단체 관계자는 “임시시설장을 포함해 시설운영에 관여했던 모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엄중한 상황”이라며 “학대 피해자, 학대 목격 거주인 모두 여전히 선산재활원에 머물러 있다. 이들이 하루라도 빨리 탈 시설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안동시의 최우선 과제”라고 성토했다.
지난달 열린 간담회에선 경북도의 미온적 태도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간담회를 주도한 최혜영 의원이 경북도의 법인 설립허가 취소를 주문하자 경북도 관계자는 원론적 답변으로 이를 회피했다.
“현재 진행 중인 사안이라 조심스러워서 대답하기 어렵다. 법인 허가취소 사유가 되는지는 법리적으로 자문해봐야 할 것 같다”라는 게 이 관계자의 답변이었다. 최 의원은 “이렇게까지 생각을 안 하니까 문제해결이 안 되는 것”이라며 경북도의 소극행정을 비판했다.
이날 간담회에서 안동시, 경북도, 복지부가 하나같이 근본적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자 당사자들을 비롯해 참석자들 모두가 실망감을 넘어 분노했다
탈시설 장애인 당사자이기도 한 420장애인차별철폐안동공동투쟁단 장미자 공동대표는 “공무원들이 이런 말장난을 하는 동안에도 거주인들은 학대시설에 남아있다. 거주인들과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봐라”라며 공무원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강도 높게 힐난했다.
정부는 지난해 8월, 3년 동안의 시범사업을 거쳐 2025년부터 2041년까지 매년 740여 명씩 지역사회 정착을 단계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 지원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 등과 공동으로 ‘장애인 탈시설 로드맵 1주년 기념 토론회’를 지난 7월 29일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열고 ‘국가 탈시설 시범사업 현황과 과제’에 대해 논의했다.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 지원 시범사업’은 집단시설 중심 보호에서 지역사회 기반의 지원 중심으로 변화하는 장애인의 복지서비스 수요 등을 반영해 중앙정부 차원에서 최초로 실시하는 시범사업이다.
시설장애인 대상으로 자립 지원 조사를 의무화하고, 자립 시 초기정착 등을 지원하는 자립 지원인력 지원 및 주거환경 개선 등 지원, 각종 지역사회 서비스를 연계하는 시범사업을 통해 지역사회로의 안정적인 정착 및 주거전환 지원에 따른 자립 경로 조성을 꾀한다는 것이다.
거주 시설은 법 개정을 통해 신규 설치를 금지할 작정이다.
이는 선산재활원 사태와 관련해 밝힌 안동시의 신규 설치 수용 계획과는 상반된 것이다.
또 현 거주 시설은 ‘주거서비스 제공기관’으로 변경해 24시간 지원이 필요한 장애인 대상 전문서비스 제공으로 기능을 변환해 나가도록 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단기·공동생활가정은 본래 설치 목적에 맞게 운영되도록 전반적인 시설 점검 및 운영기준을 정비해 나가는 방안 등이 포함됐다.
현재 탈시설 관련 근거, 거주 시설 관련 사항 등을 규정하는 ‘장애인복지법 전면개정안’, ‘장애인 탈시설 지원 등에 관한 법률’, ‘지역사회 중심의 장애인 주거서비스 지원법’ 등이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도 이를 운용하는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의지 없이는 실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나 지적 수준이 떨어지고 자기 표현력이 낮은 장애우들의 경우 이를 뒷받침하는 공직자들의 강한 의지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장애인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공직자들은 막연하게 인프라 구축 탓을 하면서 탈시설을 반대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고통받고 있는 장애인들을 생각한다면 정녕 이들이 필요로 하는 사회서비스가 무엇인가를 우선시해야 한다.
그저 지금의 사태만 피해가려는 소극적인 태도와 말장난에 그치지 말고 과감하게 구습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이 시급한 때이다.
선산재활원의 경우, 사태가 불거지면서 이런저런 소문도 무성하다.
지금은 퇴직한 안동시 복지담당 공무원이 선산재활원 거주 장애인들의 임금착취 등 횡령혐의로 구속된 박 모 원장의 여동생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얘기도 현직 공무원의 입을 통해 불거지고 있다.
오랜 기간 비리가 만연했으나 이를 묵인한 건지 적발할 능력이나 의지가 부족했는지는 추후 수사 과정에서 밝혀야 할 과제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소문만으로도 여러모로 의혹 짙은 사건이다.
해서인가, 요즘 같은 세태에 탐관오리들의 저승사자였던 암행어사 서승보 같은 이가 활약을 좀 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다음은 그가 충청도 27개 고을을 다녀온 뒤 철종에게 올린 보고서 내용 중 일부이다. 요즘 유권자나 지자체장 그리고 공직자들이 반드시 필독하고 잘 새겨들어야 할 고언이라서 덧붙였다.
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환곡 운영에서 부정이 저질러지는 모든 고을에는 반드시 수령을 잘 뽑아서 임명하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게 하십시오. 이것이 환곡의 운영을 온전하게 하는 방책이니 그렇게 되면 북과 베틀이 움직여서 베를 짜는 것처럼 스스로 작동하여 규정[經]과 변칙[權]을 번갈아 적용하며 난마처럼 뒤엉킨 장부(帳簿)를 바로잡게 될 것이고 덤불처럼 복잡하게 뭉쳐 있는 횡령 부정을 척결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곧바로 감사에게 지시를 내려 횡령된 환곡을 복원시킨 그의 성과에 따라 즉시 중앙으로 보고를 올리게 하여 직위를 올려주고 노고를 위로해 주십시오. 만약 잘못된 관습을 고치지 못하고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이 있으면 관직에서 떠난 뒤라도 해유(解由 : 임기를 마친 관원이 사무를 후임자에게 인계할 때 물품이나 재물 현황을 호조에 보고하여 그 운용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던 일. 여기서는 호조에서 발행하는 책임 면제를 인정하는 문서를 가리키는 것 같음)를 지급하지 않는다면 환곡 행정에서의 부정행위는 바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span>허언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