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들의 벼루에 대한 예찬은 그 역사가 매우 깊다.
그 가운데 중국 북송(北宋) 초기의 문인 소이간(蘇易簡, 958-997)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는 북송의 문인사대부로 『문방사보(文房四譜)』란 책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이른바 문방사보(文房四寶)로 칭해지는 필(筆), 연(硯), 지(紙), 묵(墨)을 최초로 한데 묶어 차례대로 자세히 언급한 서적에 해당한다. 문방사보란 말이 이 책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송대 초기에 이미 붓, 벼루, 종이, 먹을 하나로 보아 문방사보로 통칭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말하길, “네 가지 보배 가운데 벼루가 으뜸이다. 붓과 먹과 종이는 모두가 세월과 함께 없어지지만 오직 벼루만이 평생을 함께 할 수가 있다.(四寶硯爲首,筆墨兼紙皆可隨時收索,可與終身俱者,惟硯而已.)”라고 하였다. 주로 돌로 만들어진 벼루의 특성으로 보면 이 말은 매우 수긍이 가는 말이다.
소이간(蘇易簡, 958-997)은 중국 북송 태종(太宗) 때의 문신으로 지금의 사천성 사람이었다. 문장이 뛰어나 일찍 벼슬을 얻었고, 태종의 신임을 얻어 한림학사, 참지정사 등을 맡은 적이 있다. 그러나 술을 너무 좋아해 39세에 사망하였다. 생전에 태종은 그가 호주가임을 알고 여러 차례 주의를 주었고, 심지어는 「계주(誡酒)」, 「권주(勸酒)」 등을 적어 그로 하여금 모친 앞에서 낭독하게 하기도 하였지만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글씨도 뛰어나 「가모본난정(家摹本蘭亭)」이 전하고, 소순흠(蘇舜欽), 소순원(蘇舜元)과 함께 동산삼소(銅山三蘇)로 칭해진다.
또 비슷한 시대인 북송의 시인 당경(唐庚, 1070-1120)이 지은 『고연명서(古硯銘序)』에서도 벼루의 덕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찬하였다.
“벼루는 붓과 먹 등과 함께 그 출처는 서로 가까우나 오직 수명에 있어서는 서로 가깝지가 않다. 붓의 수명은 날로 계산하고, 먹의 생명은 달로 계산되지만, 벼루의 수명은 세대(世代)로 계산된다. 그 몸체를 두고 말하자면, 붓은 가장 날카롭고 먹은 그 다음이며, 벼루는 가장 둔한 것이다. 이는 어찌 둔한 자가 장수하고 날카로운 자가 요절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그 쓰임을 두고 말하자면 붓은 가장 동적(動的)이고, 묵은 그 다음이며, 벼루는 가장 조용한 자이다. 이 또한 어찌 고요한 자는 장수하고 요란스러운 자는 요절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나는 여기서 양생의 도를 얻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