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에 대한 선비문인들의 애호는 유명한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송 휘종(徽宗) 때의 서화가 미불(米芾)이다. 미불은 평생 벼루와 기석(奇石)을 사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춘저기문(春渚紀聞)』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어느 날 송 휘종이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 큰 병풍을 쓰도록 하였다. 미불은 궁에 도착한 후에 내시에게 부탁해 붓과 벼루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런데 휘종은 자신의 서안에 놓인 단계연을 가리키며 그것을 사용하게 하였다. 미불은 글씨를 다 쓴 후에 그 단계연 벼루를 받쳐 들고 아뢰었다. “이 벼루는 이미 황상께서 신에게 명하시어 사용하게 하였사오니 다시 황상께 드려서는 안 될 것으로 아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에 휘종은 크게 웃으며 “그럼 경에게 하사하겠노라.”하였다. 미불은 기쁜 나머지 어깨춤을 추며 황은에 절을 올렸고, 황제가 번복할까 두려워 그것을 안고 바로 달아나버렸다. 그 결과 그는 온몸이 먹물로 뒤범벅이 되어버렸다. 휘종은 그 모양을 보고 깊이 감동하여 “미불이 미쳤다고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로다.”라고 했다고 한다.
미불에 이어 두 번째로 언급할 사람은 청대의 시문가 황임(黃任)이다. 벼루에 대한 그의 사랑은 연치의 수준을 넘어 벼루로 인해 관직을 파면 당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각별하였다. 그는 단계연의 고향인 광동성 단주(端州)의 고요현(高要縣)이란 곳에서 현령을 맡은 적이 있는데, 그는 재임기간 동안 먹을 것 입을 것 아껴가며 봉급을 모아 전부 벼룻돌을 사들여 좋은 벼루가 100여개가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엔 소인배의 시기를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신의 벼룻돌 가운데 재질이 가장 좋은 것들을 골라 당시 유명한 벼루장인에게 부탁해 멋지게 조각하게 하였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10개를 골라 보배로 여기며 간직하였다. 그는 고향에서 십연헌(十硯軒)이란 당호를 지어 그 벼루들을 소장하면서 자신의 호도 십연노인(十硯老人)으로 칭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십연공(十硯公)으로 불렀다. 그는 벼루를 너무나 사랑하여 낮에는 그것들을 만지며 감상하다가 밤이 되면 부인에게 벼루를 안고 같이 자게 하거나, 젊은 계집종들에게 벼루를 하나씩 끼고 자라고 하였다. 그래야만 벼루가 음기를 받아 돌이 더욱 부드럽고 매끈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벼루를 반려자로 생각하는 문인들의 벼루에 대한 사랑은 못쓰게 된 벼루를 묻어주기도 하였고, 또 사람이 죽으면 평소 고인이 아끼던 벼루를 함께 묻어주거나 혹은 부장용 명기(明器)로 따로 작게 만든 벼루를 넣어주기도 하였다. 당나라 한유가 지은 「벼루를 묻다(瘞硯文:예연문)」라는 문장은, 한유의 친구 이원빈이 4년 동안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언제나 매일 그것을 사용하던 벼루가 주인을 따라 예부시험도 치렀고, 2년 만에 진사에도 합격하였지만 한번은 포하(褒河) 계곡을 지나다 하인이 실수로 그것을 그만 땅에 떨어뜨려 깨트리고 말았다. 이원빈은 그것을 상자 속에 넣고 돌아와 경성의 마을에다 묻어주었는데, 한유가 그것을 찬양해 글을 지었다. 깨어진 벼루를 곽에 넣어 땅에 묻어준 이원빈의 행동이나 그것을 찬양하여 글을 남긴 한유의 행동은 모두 선비들의 인과 의리를 잘 반영한 행동이다. 이는 비록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묵묵히 내조를 해준 벼루의 은혜를 의리로 되갚은 선비문인들의 온유돈후(溫柔敦厚)한 정신을 잘 말해주는 일화라고 하겠다.
또 사람이 죽으면 평소 고인이 아끼던 벼루도 함께 순장하였는데, 여기서 청대의 연치(硯痴) 고봉한(高鳳翰, 1683-1749)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청대의 서화가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그는 벼루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소장한 벼루 1000여 개가 거의 자신이 직접 조각하고 연명을 새겼다. 고봉한은 『연사(硯史)』라는 벼루책자를 지었는데, 명청 이후 벼루를 논한 문장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는 정평이 나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소장한 벼루 가운데 가장 아끼는 것들로 165개를 소개하고, 그 중 112개의 탁본도를 실었다. 『연사(硯史)』속의 벼루들은 고졸하면서도 시, 서, 화, 전각이 서로 어우러진 전형적인 문인풍격을 지닌 벼루로 정평이 나있다. 말하자면 그는 벼루를 통해 자신의 시와 서예, 그리고 그림과 전각예술을 모두 융합시켜 표현한 것이다. 고봉한은 만년에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며 자신의 서화를 팔아 연명하다가 6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의 분묘가 200여년이 지난 문화대혁명 시절에 파헤쳐졌는데, 그의 관을 열어보니 100여 개의 벼루가 함께 순장되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