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를 평생의 반려자로 여기는 문인들의 태도는 비단 중국 문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송대에 해당하는 당시 우리나라 고려시대에도 문인들의 벼루에 대한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는 중국 송나라의 영향으로 벼루에 대한 열기가 대단한 듯하다. 고려시대는 돌로 만든 벼루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최근 태안 해저에서 출토된 고려청자 퇴화문 두꺼비모양 벼루(1132년 제작) 등의 발견으로 당시 벼루가 단순히 먹물을 얻기 위한 문방도구가 아니라 완상품으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고려시대의 많은 문인 가운데 특히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가 남긴 시문 가운데에는 벼루에 관한 시구들이 비교적 많다.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작은 벼루에 대한 명(小硯銘)」이라는 연명(硯銘)과 「깨진 벼루(破硯)」라는 시(詩)이다.
벼루야, 벼루야!
네가 작다하여 너의 수치가 아니다.
네 비록 한 치쯤 된 웅덩이지만
나의 무궁한 뜻을 쓰게 한다.
나는 비록 육척 장신인데도
사업이 너를 빌어 이루어진다.
벼루야 나는 훗날 너와 함께 죽기를 바라나니
우리 서로 일체가 되어 생사를 함께 하자꾸나.
「작은 벼루에 대한 명(小硯銘)」
“깨어져 어쩔 수 없게 된 것을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네.
시 짓는 마음만 깨어지지 않았다면
무슨 돌인들 벼루가 되지 못하랴.”
-「벼루가 깨지다(破硯)」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가 되면 벼루의 산지와 형태, 그리고 조각이 더욱 발전하면서 벼루에 대한 문인들의 열정도 더해갔을지언정 식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벼루에 대한 열정은 적지 않은 연명(硯銘)들이나 벼루에 관한 연시(硯詩)들을 통해 잘 드러나는데, 그 가운데서도 조선 초기 사림의 종사 김종직(1431-1492)의 벼루에 대한 사랑과 애착은 대단한 듯하다. 그의 시 「사악이 바로 전에 의주에서 와서 선천 돌벼루를 겸선에게 주려고 하거늘 내가 앗아가지고 시로써 겸선에게 사례하다」란 그의 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친구가 남에게 선물로 주려는 벼루에 눈독을 들여 중간에서 그것을 가로채가며 벼루를 받을 사람에게는 시로써 사죄하며 그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고 하였으니, 벼루에 대한 그의 열정은 위에서 언급한 미불 등과 같은 중국의 연치(硯癡: 벼루에 미친 사람)들과도 버금가는 수준이다. 김종직이 지은 다른 몇 편의 시를 보아도 벼루에 대한 그의 사랑과 애착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조선 전기에 이어 숙종에서 정조까지의 중후기에 이르면 문예부흥의 시대를 맞이함에 따라 벼루의 생산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문인들의 벼루에 대한 열정도 깊어갔다. 이 당시 한국의 연사(硯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출한 인물이 바로 조선 최고의 벼루장인으로 칭해지는 석치(石痴) 정철조(鄭喆祚, 1730-1781)이다. 사대부이면서도 벼루 제작과 수집에 심취하여 당시 “石痴”로 불려지던 조선조 최고의 벼루 장인 정철조의 벼루에 관한 일화는 유명하며, 당시 명망 있는 자들은 모두 그의 벼루를 소장하기를 염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호를 석치(石痴:돌에 미친 사람)라고 하였듯이 마치 중국의 미불이 다시 태어난 듯하다. 그러나 정철조는 벼루를 수집만 한 것이 아니라 빼어난 벼루를 직접 만든 예술가로 유명하였으니 벼루에 있어서는 미불에 비해 한수 위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정철조는 벼루장인이라기 보다는 벼루를 너무 사랑해 직접 벼루제작에 뛰어든 다재다능한 재기를 지닌 선비문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조선시대 사간원에 속한 정육품 벼슬)이란 벼슬을 지낸 양반 문인으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는 절친한 인척관계이며, 이른바 실학파 연암 집단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이서구(李書九, 1754-1825), 유득공(柳得恭, 1748-1807?) 등과도 지속적인 교류를 맺었다. 조선 최고의 연치로 부를 수 있는 그의 가장 큰 특징은 그의 호에서도 말해주듯 벼루에 대한 애호였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계사년(1773, 영조49) 윤삼월(閏三月)에 이덕무가 연암 박지원ㆍ영재(泠齋) 유득공ㆍ석치 정철조 등과 함께 평양(平壤)을 유람하기 위해 파주(坡州) 등지에서 소일하던 기록이 적혀있는데, 이에 의하면 정철조는 산수유람을 하는 가운데서도 멋진 돌을 발견하면 차고 있던 칼만으로도 뚝딱 벼루를 만들어내었다고 한다. 정철조는 획일적인 장방형의 벼루형태를 탈피하여 원석의 본래 형태를 잘 살려 자연스럽고도 예술성이 있는 벼루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재 유득공이 지은 「기하실장단연가(幾何室藏端硯歌)」에 의하면 정철조는 자신의 벼루에다 국화와 같은 가을꽃과 귀두라미를 즐겨 새기었다고 한다.
영정조 시기의 학자인 유득공(柳得恭, 1749~1807)도 유명한 벼루 수집가였으며, 조선 벼루의 역사를 정리하여 『東硯譜』란 저술을 짓기도 했으니 벼루에 대한 옛 문인들의 관심과 애호는 중국과 한국을 가릴 것이 없었다. 유득공의 벼루에 대한 열정도 대단해 앞에서 언급한 중국의 미불이나 김종직의 경우와 같이 남의 벼루에 눈독을 들여 그것을 가로챌 정도로 연벽(硯癖)이 심했다. 이는 그가 지은 시 가운데 일본의 명품 벼루 적간관연(赤間關硯)을 친구인 이정구(李鼎九)로부터 뺏고서 쓴 시작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이 시에서 “미불이 황제로부터 억지로 하사받은 먹물이 담긴 벼루를 소매 속에 넣었고, 소동파가 미불의 벼루에다 먹을 갈기 위해 침을 뱉자 미불이 그것을 더럽게 여겨 그에게 준 사연(米顚藏衣袖, 東坡唾硯顔)”을 얘기하며 옛 사람들이 모두 그러했는데 자신은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 적관연 벼루는 유독 우리 선조들이 좋아한 벼루로, 고려시대부터 정몽주, 이숭인 등이 찬미한 적이 있는, 우리 문인들이 꾸준히 선호한 벼루로 아직도 일본을 대표하는 벼루로서 시중에 판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