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들어와서도 문인들의 벼루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고 여전하였다. 당시 저명한 문인인 이상적(李尙迪,1804-1865)・이유원(李裕元,1814~1888)・한장석(韓章錫,1832-1894)・곽종석(郭鍾錫,1846-1919)・김택영(金澤榮,1850~1927)・황현(黃玹,1855~1910)・이남규(李南珪,1855-1907) 등은 뛰어난 문장가이거나 애국지사였지만 벼루에 관한 많은 연명들을 남겼다.
당시 조선이란 나라는 풍전등화와 같은 불안정한 시대였지만 이들 조선의 마지막 선비들은 조용히 독서하거나 한가한 틈을 이용해 벼루에 자신의 정을 기탁하기도 하였다.
『임하필기(林下筆記)』와 『가오고략(嘉梧藁略)』의 저자 이유원은 “나는 벼루를 씻기 좋아하니, 구양공(歐陽公)의 ‘3일 동안 벼루를 씻지 않으면 마치 세면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한 말에 대해 실로 동감한다. 갓 벼루를 씻어서 대하면 때를 씻고 일월을 보는 것보다 못하지 않다.”(『임하필기』제35권 [벽려신지(薜茘新志)])라고 하였듯이 벼루에 대한 관심이 매우 특별했다.
그는 『임하필기』 「화동옥삼편(華東玉糝編)」에서 벼루에 관한 많은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이를테면 홍문관의 ‘주문연의 벼루’라든가 강희・건륭・기효람 등등의 벼루에 관한 많은 재미있는 일화와 고사들을 담고 있다. 그도 많은 연명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 퍽 인상적인 것은 「예연명(瘞硯銘)」이라는 벼루를 묻어주면서 지은 연명이다.
이는 전술하였듯이 일찍이 중국 당나라 때의 한유가 친구 이원빈이 깨어진 벼루를 땅에 묻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지은 「벼루를 묻다(瘞硯文)」라는 문장과도 매우 유사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벼루야, 벼루야. 나와 함께 늙어가네. 내 붓이 이미 퇴화되었거늘 너도 어찌 늙지를 않겠는가! 이제 늙었구나, 늙었구나. 너는 장차 흙과 함께 늙겠구나. - 이유원, 「예연명(瘞硯銘)」, 『가오고략(嘉梧藁略)』
사실 벼루를 묻어주던 조선시대 문인들의 이야기는 이유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유명한 지리학자였던 신경준(申景濬, 1712-1781) 또한 벼루에 대한 애호가 특별했을 뿐만 아니라 벼루를 묻어주었던 사연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조선중기 예학자 김장생의 남포연을 얻어 보물로 삼았는데, 주인이 바뀌며 유전(流轉)하는 벼루를 보며, 귀한 것일수록 한 사람이 독점하지 못하는 것 또한 조물주의 뜻이 아닐까 생각했으며, 반면 자신이 30년을 사용하다 다 닳게 된 벼루는 차마 아무데나 버리지 못하겠다며 한양의 남쪽 인경산(引慶山)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유구한 세월 뒤에 누군가가 벼루를 다시 꺼내 써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기록했다.
그 외 곽종석(1846-1919)・김택영(1850-1927)・황현(1855-1910)・이남규(1855-1907) 등 한말의 문인이자 애국지사들은 조선말기의 불안하고 냉혹한 환경 속에서 투쟁적인 치열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벼루를 통해 마음을 추스르며 정신적인 안정을 얻고자 하였다. 이는 그들이 남긴 많은 연명을 통해서 확인된다. 황현도 그 가운데의 한 사람이다. 그는 『매천야록(梅泉野錄)』으로 유명한 조선말기의 걸출한 선비문인이자 순국지사이기도 하다. 그의 문집인 『매천집(梅泉集)』에는 연명이 특히 많이 보인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양(光陽)의 송천사(松川寺)에 오래된 비석(碑石)이 있었다. 그 비석 글씨가 고우면서 힘차서 명품이라 할 만했는데, 절이 폐해지면서 비석도 잘렸다. 내가 그중에 한 조각을 구해서 잘 다듬어 벼루로 만들고는 다음과 같이 연명을 지었다.
이 돌이 과거에는 글을 싣더니 / 지금 와선 먹물을 담고 있구나 / 그나저나 문자와 인연이 있는 / 아아, 아름다운 이 돌이여 / 부처 떠나 유학으로 돌아왔으니 / 오랜 세월 영원토록 끝내 길하리.- 「송천연명(松川硯銘)」,『매천집(梅泉集)』
위 「松川硯銘」을 보면 매천은 산수 유람을 하는 가운데서도 특이한 벼루재료가 있으면 집으로 가져와 손수 깎아 벼루로 만들고 그것에 대한 연명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망국의 통한으로 자결을 하였지만 벼루를 만들고 연명을 새기는 이 순간만은 망국의 울분을 잠시나마 잊었을 것이다.
구한말의 의사(義士)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선생의 벼루에 대한 사랑도 우리나라 역대 그 어느 문인에 뒤지지 않았다. 4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남규 선생의 문집 『수당집(修堂集)』에는 벼루에 대한 그의 시와 많은 양의 연명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들을 보면 집에서 선조 대대로 전해오던 벼루가 다른 사람의 수중에 넘어간 것을 알고 그 자에게 간청해 돈을 들여 다시 사와 선조에게 기도하고 연명을 짓게 된 사연이라든지 자신의 외조부가 어머니에게 준 벼루가 어머니가 사망 후 사라졌는데 그 후 우연히 집의 서재를 수리하다가 흙속에서 발견되어 그 기쁨을 노래하고 벼루함을 만들어 영원히 보존하는 이야기 등 벼루에 대한 깊은 정이 오롯이 베여있어 매우 감동적이다.
그의 연명들을 읽어보면 이남규 선생은 선조들이 물려준 벼루를 마치 선조 그 자체인양 갖은 정성으로 그것을 정중히 대하고 있으며, 선조들을 대하는 마음으로 벼루를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선조들에 대한 깊은 존경과 정이 바로 벼루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선조들의 벼루를 보며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 받아 열심히 공부하여 부끄럽지 않는 훌륭한 후손이 될 것을 다짐하고 있음을 알 수도 있다.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되게 할 수는 없다(士可殺, 不可辱)”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일본군에 의해 피살된 그의 삶을 조명하면, 벼루를 대하는 이런 마음이 선조를 대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고, 그 마음은 다시 조국을 대하는 마음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이남규 선생의 가문은 현충원에 4대가 안장된 유일한 가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