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술하였듯이 문인들의 벼루에 대한 사랑과 예찬은 그 역사가 매우 깊다. 벼루는 단순한 문방도구의 차원을 뛰어넘어 문인들의 평생 반려자로 간주되었고, 문인들은 그것을 사랑하고 예찬하며 수집・감상하면서 행복한 희열감은 물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자아성찰 및 인격수양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이로써 벼루는 그야말로 단순한 필기도구가 아니라 문인들의 자아성찰과 인격수양에 도움을 줌으로 인해 문인정신 내지는 선비정신을 조장하고 활성화시키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런 역할은 주로 문인들이 벼루를 예찬하며 지은 연명(硯銘)들을 통해 반영되었는데, 문인들의 벼루에 대한 사랑과 그들의 벼루문화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연명이다.
연명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고증하기란 어렵지만 ‘명’이란 문체가 유행한 것은 대체로 한대로 보며, 최초의 연명은 1978년 발굴된 하남성 동한시대 묘 속의 돌벼루에 새겨진 것으로 본다. 따라서 연명 역시 동한시대에 크게 유행했다고 볼 수 있다.
명이란 원래 자신을 경계하는 내용이나 사물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기물에다 새긴 문체다. 이를테면 책상의 오른쪽에 새겨 스스로 경계하는 문체가 좌우명(座右銘)이며, 당대 유우석(劉禹錫)의 〈누실명(陋室銘)〉이나 한유(韓愈)의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志銘)〉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연명은 벼루 위에 새긴 문자나 도안을 말하는데, 자유로운 문체로 長短이 일정치 않으며, 시나 산문이 모두 가능하였다.
따라서 연명은 벼루의 덕에 대해 논한 것에서부터 자신에 대한 경계나 가슴 속의 정감을 담고 있는 철리성과 문학성이 겸비된, 그 문학성이 매우 높은 문장이다. 연명이란 벼루에 새긴 명문(銘文)으로 주로 벼루의 덕을 문학적 내지는 철학적으로 기록한 글이지만, 문인들이 언제나 곁에서 그 글을 대하며 자신의 마음을 경각시키는 좌우명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벼루문화는 벼루와 벼루조각, 그리고 연명문화로 이루어졌다고 할 정도로 연명은 벼루문화를 대표한다.
옛날 우리나라 문인들도 연명을 많이 지었다. 이를테면 이규보(1168-1241)의 〈소연명(小硯銘)〉이나 이제현(1287-1367)의 〈식영암연명(息影菴硯銘)〉을 비롯해 조선시대에도 많은 문인들이 연명을 남겼다. 그러나 현존하는 우리 고연(古硯)에는 연명이 있는 벼루들이 극히 드문데 비해 중국의 고연들은 연명이 비교적 많아 중국벼루의 가치는 그 속에 새겨진 연명에 의해 결정될 만큼 연명은 벼루의 가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