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와 민속학>
벼루는 조상들이 남긴 유산으로서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재는 유형문화재와 무형문화재, 그리고 기념물과 민속문화재로 나눠지는데, 벼루는 그 중에서 민속문화재에 해당한다.
민속문화재는 대개 의식주에 관한 것, 생업(生業)에 관한 것, 교통·운수·통신에 관한 것, 교역에 관한 것, 사회생활에 관한 것, 민속예능·오락·유희에 관한 것 등 8개 분야로 나뉘어 지정되는데, 벼루는 민속공예품으로 분류되어 민예품에 속한다.
문화재청의 분류에 의하면 민속문화재는 우리만의 생활사가 갖는 특징을 잘 보여주고 전통적인 생활사의 추이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 가치와 의미가 인정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벼루는 문방도구로서 단순한 생활사의 범위를 뛰어넘어 유교의식이 반영된 남성용 민예품으로 선비문인들의 정신문화를 반영한 것이라 그 가치는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민예품에 속하는 벼루의 문화 인문학적 가치는 문인들의 선비정신과 문학을 담고 있는 것 외에도 민속과 전통공예품으로서의 가치를 간과할 수가 없다.
민속적으로 볼 때 벼루는 우리 민족의 풍속과 전통을 많이 반영하고 있는 귀중한 민속학적 자료이다. 우리나라 민간에서 벼루는 예로부터 길상과 행운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과거의 급제와 벼슬이 목표였던 우리나라 옛 사람들에게 벼루는 가문에 복록(福祿)과 행운을 전해주는 의미를 가졌을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존경의 의미나 학업이나 공부 내지는 심신수양을 장려하는 의미에서도 서로 벼루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전술한 바대로 고려・조선시대의 문인들은 우정의 표시로 서로 벼루를 곧잘 선물하였으며, 조선시대 홍문관에서는 문단의 영수라고 할 수 있는 홍문관 대제학에게 존경의 의미로 대대로 주문연을 전하였던 것도 이런 의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옛 선비들이 벼루를 연전(硯田)이라고 부른 것도 농부가 밭을 갈 듯이 선비는 항상 벼루를 통해 문장을 지으며 입신양명을 위해 자신의 앞날을 경작하였기에 “연전에는 흉년이 없다(硯田無惡歲)”라고 하였다. 또 아이가 태어나 돌이 되면 갖는 돌잡이에서도 전통적으로 언제나 벼루가 맨 앞 중심에 놓였고, 이것을 집으면 아이는 학운이 뛰어나 출세를 하는 것으로 믿었다.
벼루가 지닌 이런 길상과 행운, 그리고 복록을 전해주는 뜻 때문에 옛 사람들은 벼루를 매우 귀하고 소중히 여겼다. 이른바 뼈대 있는 가문에서는 선조가 사용하던 벼루를 자자손손 전하며 가보로 삼는 관습이 있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근래까지만 해도 결혼하는 한 쌍의 젊은이에게 종종 벼루를 선물하기도 하였으며, 정년퇴직하는 공무원이나 무슨 기념식의 선물로 가장 흔한 것 중의 하나가 벼루였으며, 그 외에도 벼루는 종종 남에게 주는 선물로서 가장 귀하면서도 흔한 물건에 속하였다.
벼루의 이런 길상적 의미 때문에 심지어 꿈에 벼루와 붓 등을 보면 행운이 따르는 길몽으로 여겨져 먼 곳에서 소식이 오거나 오래 못 만났던 상대의 안부를 듣게 될 것을 알리는 꿈으로 해석되었다.
벼루가 지닌 이런 길상과 복록의 의미는 벼루에 조각되어진 문양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보통 벼루에 새겨진 무늬는 십장생(해・산・물・돌・소나무・달 또는 구름・불로초・거북・학・사슴)을 비롯하여 용, 봉황, 호랑이, 물고기, 박쥐, 개구리(혹은 두꺼비), 매미, 거미, 포도, 매화, 국화, 대나무, 태극문, 아자문 등등인데 이런 문양의 이면에는 모두 민간에서의 자연물 경외사상, 과거급제, 다산, 기복, 벽사, 수호, 부귀, 장수, 절개, 음양의 조화 등의 다양한 길상의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 외에도 벼루에 표현된 다양한 조각과 문양은 우리의 전통문양과 민화의 보고일 뿐 아니라 종종 그 자체가 당시의 풍속과 민속을 말해주는 풍속도의 역할을 하였다. 이를테면 조선시대 초기에 많이 제작된 극사실적 풍격의 위원석(渭原石) 풍속도(風俗圖) 일월연(日月硯)」에는 6백년 전 우리네 조상들이 밭 갈고 씨 뿌리고 모심고 낚시하고 차를 끓이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삶의 모습이 극히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새겨져 있어 당시의 생활사와 풍습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으며, 기타 벼루들에 새겨진 여러 가지 다양한 문자나 문양들을 통해서도 우리의 전통적 민간사상이나 민간신앙 등을 엿볼 수가 있다.
칠성문(七星紋) 벼루에는 한민족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칠성신앙을 말해주고, 일월문(日月紋) 벼루에서는 한민족의 전통사상인 일월숭배사상이 드러나며, 고대 신화에 나오는 태양 안에서 산다는 세 발 달린 상상의 까마귀가 조각된 일중삼족오(日中三足烏) 벼루에서는 태양에 까마귀가 산다는 우리민족의 삼족오 신앙을 말해주기도 한다.
전설 속의 벼루는 종종 영성(靈性)을 지녀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는 신령함을 지니고 있었다. 최흥벽(崔興璧, 1705∼1786)의 <조씨자색연기(趙氏紫色硯記)>에는 벼루에 관한 다음과 같은 매우 신기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파산 조공은 젊어서 초서와 예서에 능해 이름이 알려졌다. 나이가 여든에 가까웠지만 여전히 정신이 왕성하고 몸이 건강하였으며 필력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공(公)은 옛날 성(城)의 서쪽에 살았는데, 때는 신미년 7월이었다. 당시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을 때, 백기환이라는 한 아전이 커다란 벼루 하나를 가져와 팔았는데, 벼루는 바로 세상에 알려진 영가(永嘉, 안동의 옛 이름) 자석연(紫色硯)이었다.
돌결이 매끈하고 기름지며 고와 보통 벼루들과 같지 않았다. 길이는 한 척(약 30센티)에 가까웠고, 넓이는 3분지 1을 감한 길이(즉 20센티 가량)이었다. 공은 그것을 보고 좋아하여 보리 서 말과 바꾸었으며, 언제나 그것과 함께 하며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후 공은 산 아래에 살았는데 임자년 가을에 물난리가 나 야밤에 물이 밀려들어 집이 잠겨 떠내려가고 울타리도 내려앉았다.
식구들은 겨우 몸을 견졌지만 벼루는 지키지 못했다. 그 때를 당해 사람의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웠는데 하물며 다른 물건이랴! (그리고) 7월 3일로 기억하는데 경신년 여름에 또 홍수가 났다. 그리고 7월에 물이 빠진 다음 공의 큰 아들이 마침 산언덕을 따라 가는데 산골짜기 아래 모래 가에서 물건 한 모서리가 훤히 드러났는데 곧장 파보니 바로 잃어버린 그 벼루였다. 몸체는 조금도 결함이 없어 옛 모습 그대로였다.
벼루는 공이 사용한 지가 42년이었고, 물난리로 잃은 지가 9년이었는데 다시 얻게 된 것이다. 위험한 급류와 큰 비에도 부서지지 않았고, 돌무더기와 자갈 더미 속에서도 다치지 않아 그 난리와 고난을 겪은 후에도 온전하게 몸을 지켜 옛 주인에게 그렇게 돌아간 것이다. 세 번 모습을 드러낸 것이 모두 7월이었으니 참으로 신기하고 기이하였다. 음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찌 그러하겠는가!-최흥벽(崔興璧),<</span>조씨자색연기(趙氏紫色硯記)>中
벼루가 지닌 이런 신령스러움은 벼루에 대한 문인들의 정성으로 인한 상호 교감의 결과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 까닭에 문인들은 벼루를 인격체인 동반자로 생각하여 그것의 생명이 다하면 묻어주기도 하였으니 이는 비단 중국의 문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신경준(申景濬)과 이유원(李裕元)이 지은 <예연명(瘞硯銘, 벼루를 묻어주며 지은 연명)>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 외에도 우리나라 전설이나 전래동화 등에도 벼루가 가끔 출현하는데, 벼루는 언제나 비싸고 귀한 물건으로 간주되었으며, 그러기에 어쩌다 잘못되어 깨지는 경우가 많이 묘사되어 극적인 상황을 만든 것도 한 특징이었다. 알려진 몇 개의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의성 김씨 운천 종가의 삼보 중의 하나인 매화연은 이조 선조 때 승지 김백암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신종황제로부터 기념품으로 하사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의성 김씨댁으로 넘어 오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김백암의 외손되는 김경와(휴) 공이 어릴 때 외가에 놀러갔다가 그 벼루가 탐이 났다. 그래서 외조부에게 달라고 졸랐다. 김백암이 이르기를 나는 열심히 공부하여 입신양명해서 그 대가로 얻은 것인데 너는 아직 이룬 것 없이 그냥 얻으려 하느냐 친손이나 외손이나 간에 먼저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경와공은 그로부터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14세에 초시에 급제 했다. 과거 급제의 소식을 듣고 그는 집에도 들리지 않고 바로 외조부 댁에 찾아가서 벼루를 얻었던 것이다.
이 벼루는 중국의 단계석으로 세로 30cm 가로 22cm의 장방형에 매화, 대, 구름, 해, 산, 사슴등이 교묘하고 아름답게 새겨져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탄케 하는 훌륭한 것이다. <</span>의성 김씨 운천 종가의 삼보>, 안동관광정보센터: 문화유산
옛날 한양에 있는 재상집에서 진천의 한 선비에게 진천의 명물로 알려진 상산벼루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진천의 선비는 얼마 후 좋은 벼루 한 개를 값을 많이 주고 구한 뒤에, 걸음이 잽싼 이웃 사람에게 노자를 후히 주고 서울의 재상집에 갖다 주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부탁을 받은 사람은 가라는 한양은 가지 않고 며칠 동안 투전판과 술집에 다니며 노잣돈을 다 써 버렸다. 집에서는 아이들이 어찌나 짓궂던지 장난을 하다가 벼루 잔등이를 부러뜨려 버렸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태연히 있다가 겨울이 지나고 새 봄이 되어 부러진 벼루를 잘 맞추어 보자기에 싸 가지고 한양으로 길을 떠났다.
벼루를 가진 나그네가 광나루에 도착하였을 때는 배가 건너편에 가 있었다. 이 사람은 건너편에 있는 배를 향하여 “이 사공놈아!” 하고 호통을 쳐댔다. 사공이 건너다보니 하찮은 놈이 호통을 치는지라 화가 잔뜩 났다. 사공이 건너와서 벼루를 가진 나그네를 둘러쳐 버렸다. 벼루를 가진 나그네는 실색을 하면서, “아이고, 이놈 때문에 벼루가 부러졌다.”고 호들갑을 떨며 벼루 보자기를 풀었다. 아니나 다를까, 벼루는 부러지고 쪽지에는 한양에 있는 재상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벼루를 가진 나그네는 이때다 하고는, 사공한테 재상집에 보낼 선물을 깨뜨렸으니 이제 어떡할 거냐고 꾸중을 하였다. 사공이 생각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에 “여보시오, 나그네 양반. 돈을 줄 테니 용서해 주시오.” 하고 사정을 하였다.
그런데 나그네는 쌀 한 섬 값을 준다고 하여도 안 된다고 하고, 두 섬 값을 준다고 사정을 하여도 안 된다고 하더니, 쌀 석 섬 값을 받아 챙겨 가지고 돈은 주막집에 맡겨 두고, 사공한테 맞아 피투성이가 된 옷을 입고 부러진 벼루를 보에 싸 가지고 재상집을 찾아갔다. 그러고는 광주 어느 산골에서 도적떼를 만나 매를 맞고 벼루까지 부러뜨렸다고 사죄하였다. 재상은 고생이 많았다고 나그네를 위로하며 이튿날 노자를 후히 주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나그네는 이곳저곳에서 돈을 우려먹었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span>상산벼루 전설>,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옛날, 산속에 큰 절이 있었습니다. 이 절에는 늙은 스님이 있었는데, 맛있는 곶감을 벽장 속에 감추어 놓고 혼자만 몰래 꺼내 먹곤 했어요. 그러다가 나이 어린 중한테 들키면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너희들이 이 곶감을 먹으면 배가 아파 죽는다.”
그런데 아주 영리한 동자승 한 명이 스님이 볼일 보러 간 사이에 벽장 속의 곶감을 꺼내 먹었어요. 한 개를 먹고 나니 맛이 좋아 하나 하나 먹다보니 남은 곶감도 마저 다 먹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다 먹고 난 후에야 큰일이라고 생각한 동자승은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지요. 그러고는 스님이 무척 아끼는 벼루를 뜰 앞에 냅다 던져 깨뜨려 버리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끙끙 앓는 척을 하였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스님이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끙끙 거리는 나이어린 중을 보고는 “얘, 어디 아프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린 중은 울먹이며 대답했어요.
“스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잘못하여 스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벼루를 깨뜨렸어요. 그래서 죽기를 작정하고 벽장 속에 있는 곶감을 먹어버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스님은 어이가 없었어요. 스님은 공여한 거짓말을 한 댓가로 결국 아끼는 벼루와 맛있는 곶감을 모두 잃어버렸지요. <</span>벼루와 곶감>, 전래동화, 이영호
한말 개화기에 애월리에서 훈학을 했던 창암(菖岩) 박형순(朴亨涥)은 이 마을에 상당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4형제중 막내인 그는 노상 붓과 벼루와만 씨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수들로부터 빈축을 살 때가 많았다.
“우리 아지방은 벼루와만 씨름을 하는디 벼루에서 먹을 게 나는가?”
생각다 못한 창암은 맷돌로 한쪽은 벼루, 또 엎어놓으면 한쪽은 덩드렁(짚을 두드릴 때의 밑돌)이 되게 해서 형수들의 눈을 피했다.-<</span>박훈장(朴訓長)의 벼루>, 제주 애월리 애월읍
단북면 소재지에서 앞 쪽으로 개울을 건너면 산협도 아닌 들판에 도로를 옆으로 끼고 커다란 못이 있다. 언제부터 생겨난 못인지는 자세히 모르나 어처구니없는 전설을 안고 연면히 내려왔다. 옛날 옛적 그 어느 날 이 못의 자리에는 민가가 있었다.
그 집에서는 옥동자를 분만하였는데 태어난 아이는 그 몸집이 아주 컸고 골상이 비범하였다. 날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자라났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멀리까지 퍼지게 되었다. 행여나 역적이 되려는 징조가 아닌지 수군거리는 사람도 많았다.
한 없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그의 부모들은 어처구니없는 걱정으로 일관하며 지내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남의 행운을 시샘하는 풍조는 마찬가지였다. 어리석은 그의 부모들에게 그 아이를 없애버리는 것이 후환을 면하는 길일 것으로 귀띔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자나 깨나 고심하던 그의 부모는 드디어 그의 아들을 없애려는 어처구니없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처절한 심정으로 생명을 끊으려는 순간에 기적의 천변이 일어났다. 마른하늘에서 뇌성이 치고 벼락이 떨어졌다.
그의 집은 흔적 없이 파여졌고 용마(龍馬)가 울면서 안장을 버린 채 하늘로 날아갔다. 벼락이 떨어진 곳은 커다란 못이 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벼락못(雷池)이라 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되니 벼루못(硯池)이라 변음이 되고 의미도 바뀌어져 버렸다. 용마가 버리고 간 안장을 주어다가 이실(梨室)마을에서는 원혼(寃魂)을 위로하는 신당을 짓고 화상도 그려 동신(洞神)으로 모신다.
오랜 세월에 여러 가지로 영험이 나타나는 신당이라고 아직껏 해마다 제사를 정성들여 지낸다. 물을 공급하여 오면서 태공들의 놀이터로 제공되기도 한다. 먼 먼 옛날의 전설과 낚시꾼들의 형형색색 옷차림들은 지극히 대조적이고 푸른 하늘의 흰구름은 옛과 오늘의 변화를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span>벼루못(硯池)>, 의성 단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