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벼루는 현재 민속품이자 공예미술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기에 벼루의 문양에 나타난 회화성과 조각미, 그리고 문자로 새겨진 서예의 격과 전각의 예술성 등도 벼루의 가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며, 이런 제반 사항이 예술적인 높은 단계에 이르면 좋은 벼루로서 가치를 발하게 된다. 물론 그 외에도 벼루의 석질과 제작 연대와 사용자, 그리고 연명의 여부와 그것의 진위여부는 별도로 벼루의 가치의 중요한 척도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벼루에 나타난 회화, 조각, 서예, 전각, 민화 등은 우리나라 전통미술의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전통미술 특히 조선시대 미술의 주요 영역을 대개 건축, 조각, 회화, 서예, 공예, 민화 등으로 분리할 때, 벼루는 건축을 제외한 모든 요소가 다 포함된다고 할 수가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많이 제작된 매죽문을 비롯한 사실적 조각의 위원 일월연들은 조선미술의 꽃이라고 할 정도로 미술성이 높다. 그러기에 국내 저명 벼루 수장가이자 원로시인인 이근배씨도 말하길,
오죽했으면 일본의 서예가이며 벼루 연구가인 요시다 긴슈(吉田金壽)가 “조선의 위원화초석 벼루의 조각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했을까? 나는 중국이 자랑하는 벼루들을 많이 알고 있고 나도 그런 것들을 여러 점 구했지만 아무리 따져보아도 「조선초기 풍속도 일월연」이 보여주고 있는 회화의 선과 신의 솜씨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조각의 정교함과 섬세함을 넘어서는 예술품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
청자나 백자가 중국에서 왔다하나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의 독창적 예술성이 월등하게 앞서 있듯이 비록 중국에서 나는 단계(端溪), 흡주, 송화강석(松花江石)에는 미치지 못하나 우리의 위원화초석, 남포석(藍浦石)등으로 이룬 벼루예술은 결코 저들에게 뒤지지 않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벼루는 밥그릇이나 술병 등 생활용구와는 달리 큰 선비들이 나라를 경영하고 학문과 시문을 경작한 위대한 유산이다. 그 위에 도자기나 목공예 등 어느 예술세계에서도 만날 수 없는 한국인이 만들어낸 절정의 아름다움이 새겨져 있다면 맨 앞에 내놓아야할 문화재가 아닌가. - 이근배, <</span>신의 솜씨가 담긴 벼루, 「조선 초기 풍속도 일월연」>, 월간문화재 사랑, 문화재청
이는 사실 평소 벼루라는 귀신에 홀려서 40년 가깝게 살아왔다는 이근배 시인만의 주장이 아니다. 한국에서 벼루 연구가라면 꼭 뺄 수 없는 원로 벼루수집가 권도홍씨도 중국이나 일본의 고연들을 두루 살펴보았지만 우리나라 위원석 ‘포도문일월연’만한 벼루는 없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벼루의 회화성과 조각미에 대해 옛사람들도 이미 탄복하여 그것에 관해 언급한 바가 있다. 조선중기의 문인 정구(鄭逑, 1543∼1620)의 <화연기(畫硯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나는 평소에 그림을 모르지만 그래도 좋아하는데 이는 맛이 없는 속에 맛이 있다는 것을 알고 취미 아닌 취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일찍이 그림이 조각된 벼루 한 개를 얻어 이것도 좋아하여 잘 간수하였다. 그러나 그 화법(畫法)이나 의미는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또 이것을 좋아하는 것이 무슨 심사일까 하는 생각에 스스로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이따금 한 번씩 매만지며 감상하다 보니 자연 손에서 놓아 버릴 수 없었다.
요즘 수재(秀才) 이의윤(李宜潤)이 나를 찾아와 어울리며 글을 배우는 중인데, 내가 또 이것을 꺼내어 구경하고 있노라니 이생(李生)이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해 주었다. 우거진 모습으로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은 소나무이고 길고 가냘픈 것들이 빽빽하게 어우러진 것은 대나무이며, 점점이 외롭게 날고 있는 것은 구름인데 둥근 달이 그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결이 잔잔하게 일렁이며 무늬를 이룬 것은 물이고 그 위에 울퉁불퉁한 것은 바위였다.
거기에 또 두세 줄기의 산포도가 한쪽 귀퉁이에서 덩굴져 뻗어 나가 소나무 뿌리를 휘감았고, 그 아래쪽에는 혼자 바위틈에서 비탈을 타고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 그를 마주보고 서서 고개를 들어 포도를 잡아 따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은 다 초산(楚山)의 미치광이 도사들로 아직 신선이 되지 못한 자들이었다. 풀잎 사이에서 뛰거나 달리는 것들도 있는데 이들은 풀벌레 따위로서 이름이 각기 다른 것들이었고, 윗몸을 일으켜 다리를 반쯤 구부린 채 벌레를 노려보고 있는 것은 작은 종자의 청개구리였다.
바위 위에 작은 탁자를 놓고 술 한 동이를 열어두었는데, 그 앞에서 술잔을 들고 달과 서로 문답하고 있는 자는 그가 진짜 적선(謫仙, 이태백)인지 알 수 없으나 긴 수염에 고고한 모습으로 홀로 산중에 앉아 있으므로 속세를 훌훌 벗어난 사람이라는 느낌을 풍겼다. 물가의 높은 바위에 걸터앉아 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으나 고기를 잡으려는 마음은 없고 속세를 벗어나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내가 보기에도 위수(渭水) 가 강태공(姜太公)의 기풍이 어렴풋이 깃든 것을 느꼈다.
나의 이 벼루가 길이는 한 자가 채 되지 않고 폭은 겨우 그 절반 정도이지만, 사람과 사물을 대강 갖추었으며 한적하고 말끔한 풍경이 둥근 벼루 바닥을 에워싸고서 하나의 별천지를 이루었다. 도화원(桃花源) 외에도 과연 이와 같은 세계가 있으며 무릉(武陵) 어부(漁夫)의 발길도 이런 곳에는 들어가지 못했는지 모를 일이다. 과거에는 무슨 그림인지 모르면서도 오히려 좋아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은 이미 그 설명을 들어 하나하나 다 알게 되매 또 고상한 흥취가 서로 부합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상상하건대,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칼을 잡고 생각을 구사할 적에 정신은 흥취와 서로 어우러지고 손은 마음과 서로 호응한 상태에서 온종일 똑바로 앉아 작업을 하면서도 수고스럽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니, 과연 양숙(養叔)의 활솜씨와 포정(庖丁)의 소 잡는 기술과 같은 기예가 어찌 겉으로 좋아하는 정도만으로 습득할 일이겠는가. 그런 다음에야 이처럼 정밀하고 능숙해질 수 있으며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경지를 이룩할 것이다. 그 남달리 고충을 겪었을 속마음에 내가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 벼루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구름과 산, 물과 바위 사이에서 옛사람을 한번 만나 보았으면 하는 것은 이 또한 인정상 누구나 원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일이며, 나도 이 점에 대해 감히 소홀히 생각하지 못한다. 마을 앞 시내에서 낚시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소나무 위에 걸린 달이 밝은 빛을 뿌릴 때나 어울리는 사람 없이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데 찌르륵찌르륵 풀벌레가 울어 댈 때 이 벼루를 열고 마주 대하면 반드시 세속의 잡념이 말끔히 사라져 외물과 내 자신의 존재를 다 잊는 경지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내가 문방(文房)의 벗으로 삼는 이유가 어찌 먹을 가는 벼루의 용도로 쓰는 데에만 있겠는가. 이생은 과연 이런 의미를 이해하는지 모르겠다. 이생은 회재(晦齋) 선생의 적통을 이은 맏손자이다. 부디 각고의 노력을 다하여 가정의 학문을 저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기축년(1589, 선조22) 6월 일에 연상옹(淵上翁)은 쓰다. 정구, 『한강집(寒岡集)・화연기(畫硯記)』
연기(硯記)는 조선시대 전기 무렵에 만들어진 조각이 빼어난 사실풍의 일월연 벼루(위원석 일월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에 나타난 회화미와 그 예술성에 대한 조선시대 학자의 느낌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문장으로 우리는 여기서 조선시대 벼루의 뛰어난 공예 미술성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벼루에 나타난 회화는 민화풍의 단순하고 고졸한 풍격에서부터 이른바 조선회화의 정통이라고 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풍격에 이르기까지 모두 존재한다.
권도홍 씨가 언급한 “아름다운 한국 벼루의 본보기”라고 칭한 위원화초석의 포도문일월연(사진 참조)이 정통회화의 기풍을 지녔다면 기타 더 많은 수량의 민화풍의 일월연 벼루(사진 참조)들은 조선민화의 전형적인 기풍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우환(李禹煥)이 지적하였듯이 이조(李朝) 미술의 특징이 “생활애(生活愛)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민화는 조선시대 예술의 한 중요한 축으로 더욱 조명되어야 하고, 그렇다면 벼루는 민화의 보고로서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될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민속회화와 전통문양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벼루에 나타나 공예미술성은 회화와 조각 뿐 만이 아니라 서예와 전각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고연에 새겨진 연명은 벼루의 진위와 나이를 알게 해주는 증거일 뿐 아니라 잘 새겨진 것은 그 자체가 문학・서예・전각작품이다. 따라서 전술하였듯이 연명은 벼루의 가치를 높여주고, 반대로 벼루의 조각과 석질이 좋아도 연명이 조잡하면 벼루의 가치도 함께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