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통문화가 숨쉬는 벼루는 문방사우 가운데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또 매우 매력적인 품목이 아닐 수가 없다. 각양각색의 돌로 제각기 다른 모습인 천의 얼굴로 조각된 벼루들은 예로부터 수많은 선비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런데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藍浦 벼루의 美에 대한 연구나 도록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시작되었음은 새삼스럽지만도 않은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1973년 7월에 문화재 관리국의 주최로 실로 한국에서 전무후무한 ‘名硯展’이라는 행사가 서울 창덕궁 특별전에서 열려 전국의 벼루 수장자들로부터 179점의 엄선된 벼루가 선택되어 전시됨으로써 한국벼루 즉 ‘海東硯’의 전체적인 모습과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각 시대의 표준적인 벼루들이 선택되어 우리나라 벼루에 대한 관심과 연구열이 고조되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1976년에는 이 행사의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는 벼루에 관한 최초의 전문적인 학위논문들도 탄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조선시대 벼루에 나타난 문양의 조형적 분석』이라는 제목의 숙명여자대학교 응용미술학과 공예전공 이임순의 석사학위 논문이다.
그러나 그 후로 몇 편의 석사학위 논문을 제외하면 벼루를 연구하거나 소개하는 학술논문이나 전문적인 도록저서들이 계속 활발하게 출현하지 못하였다. 한국에서의 벼루는 소수의 뜻있는 자들의 소장품에 그칠 뿐이며 사회적으로도 이를 문화재로 인식하여 중시하지도 않고, 유관 학자들도 이를 연구의 대상에서 도외시함으로써 그야말로 벼루는 ‘비운의 문방구’로서 가장 천대받는 우리의 애물단지로 전락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삼국시대부터 비롯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의 벼루는 현재 그 맥이 끊겨 비록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벼루기능 장인이 있다 해도 이미 우리의 전통에서 멀어진 그야말로 ‘국적불명’의 벼루를 생산해내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조선벼루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전국에 산재했던 벼루장인들이 차차 자취를 감추었고 유일하게 충남 보령의 남포벼루와 충북 단양의 단양자석벼루가 아직까지 몇 대째 명맥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의 고유한 전통적인 제작법과 형태를 크게 벗어나고 있어 조선벼루의 은은하고 소박하면서도 고박한 아름다움을 다시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공예나 민속공예의 범주에서도 벼루는 석공예 속에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종종 석탑 등의 대형 석공예에 밀려 생략되기가 일쑤이고, 다만 문방구의 일원으로 중시되기도 하지만 정작 ‘문방사우’에도 끼지 못하는 연적이 국보보물로 지정된 것이 10여 점에 가까운 점과는 대조적으로 벼루는 김정희가 사용한 3점의 벼루만 ‘추사’라는 이름으로 겨우 문화재의 대열에 끼일 정도이니 실로 벼루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문화재의 사각지대인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옛날에 한반도 전 지역에서 거의 골고루 연재가 생산되었다. 그러나 붓과 먹의 실용성이 없어지면서 벼루도 함께 자취를 감춰버렸다. 영남의 중심인 안동은 옛날 우리나라의 벼루 산지 가운데에서도 매우 주요한 거점 산지 가운데의 한 곳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신문화’ 고향 내지는 ‘선비정신’의 유산을 자랑하는 이곳에서도 옛날 우리나라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고 선비들의 영혼이 깃든 안동 벼루에 대한 맥이 끊김은 대단히 애석함은 물론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임을 자처하는 안동의 특산물 가운데 간고등어나 산마는 버젓이 있어도 안동자석벼루는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중국예술의 특색은 기와와 벽돌에 있고, 일본공예의 특색은 목칠에 있으며, 조선공예의 특색은 석공에 있다고 한다. 벼루는 우리의 우수한 석공예품 가운데서도 가치가 높은 문방구에 속한 품목이다. 그러나 벼루문화의 가장 큰 가치는 돌로 된 조각품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포함된 인문정신에 있다. 옛날 선비문인들은 벼루를 한낱 돌로 된 물건으로 보지 않고 그것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으며, 벼루는 그들이 예술의 전당으로 통하는 교량의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벼루를 통해 철학・문학・예술을 논하였고, 벼루는 문인들 곁에서 평생을 같이하는 정신적 동반자였다.
예로부터 문인들이 죽으면 벼루를 순장하기도 하고 닳아서 못 쓰게 된 벼루를 묻어주기도 한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다. 벼루의 인문가치와 의의는 한마디로 말해 문인정신과 선비문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학문으로 업을 삼고 벼루로 밭을 삼으며 벼루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자 했던 선비문인들의 행동에서 우리는 학문과 창작을 본분으로 삼던 문인정신을 배울 수가 있으며, 보잘것없는 작은 돌이지만 그 은혜로움에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 ‘순장’과 ‘예연(瘞硯)’으로 보답하는 행위를 통해 정과 의리를 중시하던 선비정신을 배울 수가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도 이런 벼루문화가 엄연히 존재하였다. 이제 우리나라 벼루문화의 고찰을 통해 옛날 선비들의 문인정신과 선비문화를 다시 찾아내는 작업이 절실할 때이다.
오늘기사로 '최병규 교수의 벼루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그동안 '벼루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안동 암산에 벼루를 만들 수 있는 좋은 돌이 있다고 최 교수님이 주장하고 계십니다. 안동시에서 잘 검토해서 안동에 맞는 문화상품으로 개발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안동에는 안동에 맞는 좋은 문화상품이 많지만 벼루는 개발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많습니다.
비단 벼루생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벼루 생산이 계기가 되어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고, 문방사우의 질이 높아질 것입니다. 또한 벼루가 개발되는 지역에서 붓글씨나 사군자 등에 대한 관심이 확산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신문화의 도시로서의 여러 역할을 할 수 있는 벼루개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정으로 제안드립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