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집안 형님과 친한 벗이 퇴계 선생의 밥상에 관한 일화를 각각 SNS 로 보내왔는데 살펴보니 동일한 내용이었다. 흥미도 있으려니와 의미도 있어 소개한다.
퇴계가 고향에 돌아와 제자를 양성하고 있을 때 영의정을 지낸 권철 대감이 서울에서 도산서당을 찾아왔다. 그는 훗날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무찌른 권율 장군의 아버지다. 서울에서 명망 높은 이가 700리 머나먼 길에 일개 사숙의 훈장을 찾아온다는 것은 당시 관습으로 거의 드문 일이었다. 퇴계는 동구 밖까지 나가 영접하고 기쁜 마음으로 학문을 토론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식사 때가 되자 저녁상이 나왔는데 보리밥과 콩나물국, 가지나물, 산채, 북어무침이 전부였다. 산해진미에 익숙한 권 대감은 입에 맞을 리 없어 몇 숟갈을 뜨고 상을 물리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에도 똑같은 음식이 나와 역시 몇 숟갈 뜨고 상을 물렸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더 머물 수 없었다. 떠나면서 좋은 말씀을 부탁하는 권 대감에게 퇴계는 옷깃을 바로 하며 말했다.
“융숭한 식사 대접을 못해 매우 송구합니다. 그러나 제가 올린 이 식사는 일반 백성이 먹는 것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는 성찬입니다. 대감께서 입에 맞지 않아 제대로 잡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저는 이 나라의 장래가 은근히 걱정되옵니다. 무릇 정치의 요체는 백성과 같이 즐겨야 한다는 여민동락이옵니다. 관과 민의 생활이 그처럼 동떨어져 있으면 어느 백성이 관의 정치에 심열성복하겠나이까? 이 점 각별히 유의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권철 대감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수그렸다.
‘선생이 아니고서는 누구에게도 들어 볼 수 없는 충고입니다. 집에 들어가면 선생 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에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권 대감은 서울에 올라오자 가족에게 이를 전하고 지극히 검소한 식생활을 실천했다.
백성들에 의해 구전되어 온 이 일화와 연관된 기록이 흥미롭게도 《퇴계 선생 언행록》에서 확인되었다. 제자 우성전의 기록인데, 내용은 이러하다.
선생(퇴계)이 일찍이 서울에 올라와서 서성안에 우거했는데, 지금의 좌의정 권공이 찾아와 뵈었다. 밥을 차려 대접하는데 반찬이 담박해서 먹을 수 없었던 선생은 마치 진미인 양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권공은 끝내 먹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입버릇을 잘못 길러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매우 부끄럽다“라고 했다.
제자가 기술한 내용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실제로 두 사람이 만난 장소가 서울이고, 시기도 퇴계 만년(60대 후반)이 아니고 서성 안에서 살던 50대 초반이라 앞의 일화와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대체적 줄거리는 같다.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앞의 일화에서는 퇴계가 권철에게 나라 지도자는 백성과 같이 즐겨야 하며, 그래야 백성의 심복을 받을 수 있음을 일러 주었다는 대목이 추가된 점이다. 퇴계 선생의 입을 빌려서라도 백성이 정람 하고 싶던 말이 아닐까?
《퇴계 선생 언행록》에는 음식에 관한 기록이 곳곳에 나타난다.
끼니마다 음식은 두서너 가지에 불과했고, 더운 여름철에는 건포뿐이었다. 잡곡밥을 고량진미처럼 맛있게 드셨다. 일찍이 도산에서 선생을 모시고 식사한 적이 있는데 단지 가지나물, 무나물, 미역뿐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나는 정말 박복한 사람인가 보다.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답답하고 체한 것 같아 편치 않은데 거친 음식을 먹고 나면 바로 속이 편해진다“ 라고 하셨다.
퇴계의 검약생활은 음식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세수할 때는 질그릇을 쓰고 부들자리에 앉았으며, 베옷과 칡으로 엮은 신발에 대지팡이를 짚었다. 집이 좁고 허술하여 모진 추위와 무더위를 다른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어했지만 선생은 여유롭게 지냈다. 영천군수 허시가 찾아와 ”이처럼 비좁고 누추한데 어찌 견디십니까?“라고 묻자, 선생은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 못 느끼겠다“고 했다.
퇴계는 높은 지위와 봉록을 스스로 사양하고 곤궁한 생활을 이어갔다. 아내의 장례를 치르기 힘들 정도여서 사람들로부터 이해할 수 없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결코 세속적 명리를 바라지 않았다. 대신 퇴계는 인간의 착한 본성을 찾는 학문의 성취를 이룬 대유로, 백성들과 같은 밥과 반찬을 먹고 초라한 집에서 지내며 아랫사람을 먼저 보살핀 한유로 우뚝 섰다.
그가 이 시대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것은 무엇인가? 선거철만 되면 시장에서 허름한 음식을 먹으며 ’서민 코스프레‘를 하는 분들을 보곤 한다. 더 투명해진 세상에서, 더 많이 배운 국민이 그 장면을 진정 어린 행동으로 바라볼 것인가? 깊이 새겨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