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조선시대 소송’이라는 주제로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5월호를 발행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좋은 묏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빈번하게 벌어졌던 산송(山訟)을 비롯한 여러 소송, 그리고 이에 연루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하루 5건 이상 재판하는 사또
<소송을 통해 본 조선 사회>에서 심재우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는 조선시대 ‘호송(好訟)’에 대하여 살펴본다. 흔히 조선시대에는 소송이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19세기 지방 군현에서 접수된 민장(民狀)과 그 결과를 요약·정리한 『민장치부책(民狀置簿冊)』을 분석해 보면, 지역별 민장 접수 횟수에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9개 지역 평균 한 달 민장 접수는 156건에 달한다. 이는 한 달 동안 수령이 하루도 쉬지 않는다고 가정해도 하루에 5건 이상의 결코 적지 않은 소송을 처리해야했음을 말해준다.
필자는 당시 호송(好訟) 풍속이 가능했던 이유를 개방적인 소송제도에서 찾는다. 중앙과 지방의 구분 없이 관청 개좌일(開坐日)에는 상시로 소장(訴狀)을 제출할 수 있었다. 또한 신분이나 성별과 관계없이 누구라도 소송을 할 수 있었다는 점도 조선시대 소송제도의 큰 특징이다. 이 때문에 노비는 물론 여성들도 소송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사천조(私賤條)에는 ‘삼도득신(三度得伸)’과 같은 규정이 있어, 수령의 판결에 불복하는 경우 재심을 요청할 수 있는 길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소송에서는 재판관 역할을 하는 수령의 청렴함과 능력에 따라 결과에 대한 희비가 갈리기도 하였다. 백성들은 수령이 주관 없이 판결을 내리면 무두질을 해서 이리저리 잘 늘어나는 ‘익힌 노루 가죽[熟鹿皮]’으로 비유하거나, 무능한 재판관을 ‘반실태수(半失太守, 정확히 시비를 가리기보다 양측에 절반씩 나누어주는 등 적당히 판결하는 것)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재판에서 위세에 굴복하지 않고 약자의 편에 서서 많은 백성을 감화’시킨 재판관을 명판관으로 꼽았다.
무덤 명당은 곧 후손들의 욕망
<죽은 자의 안식처, 산 자의 소원 상자>에서 최진경 박사(동국대학교)는 묘지를 ‘죽은 자의 안식을 핑계로 현재의 우리가 잘살기를 희구하는 강한 욕망을 담고 있는 공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잘살고 싶은 욕망으로 산 자가 살아가는 곳뿐 아니라 죽은 자가 안식하는 공간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그곳을 ‘길지(吉地)’라고 칭한다. 그러나 길지는 한정되어 있기에 이를 차지하기 위한 갖가지 다툼이 일어나고, 이 다툼은 재판까지 이르게 된다. 조선 후기에는 특히 묏자리를 두고 각종 싸움이 벌어지고, 송사를 통해 판결을 요하는 사례도 빈번했으니 이름하여 ‘산송(山訟)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18세기 초에 일어났던 박효랑 사건과 같이, 투장(偸葬)에서 비롯된 산송에 재판관의 정실이 개입하며 산송을 처리하던 ‘법정극’은 생사가 걸린 ‘복수극’으로 치닫게 되며 조정까지 알려지게 된다. 이 사건은 길지를 둘러싼 싸움이 왕실이나 유력가에 한정된 사안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싸워 쟁취해야 하는’ 실존적 차원이었음을 말해준다.
조선 후기 야담에 등장하는 묏자리를 소재로 한 이야기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알고 보니 아주 유능한 풍수가이거나, 풍수가에게 작은 은혜를 베풀었더니 바로 길지라는 보답으로 이어지는 등 즉각적인 복으로 돌아오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를 보면, 산 사람들이 길지를 지향하는 것은 죽은 자의 안식을 핑계로 땅의 기운을 듬뿍 받아 현재 인생을 뒤집고자 하는 절실함이 담겨 있다.
사건 너머를 꿰뚫는 솔로몬의 지혜
이외에도 웹진 담談에서는 ‘조선시대 소송’에 대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다룬다.
‘스토리웹툰 독獨선생전’ 5화 <칠석에 내리는 비>에서는 노비의 단순한 말 절도로 보였던 송사 너머에 노비들의 부당한 삶이 녹아 있던 진실을 독선생의 눈으로 살펴본다.
‘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의 <분필로 동그라미를 그릴 권한>에서는 솔로몬의 재판을 변주한 다양한 작품 중 연극《회란기》와 창극《코카서스의 백묵원》을 소개한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선의를 베풀어 아이를 키웠음에도 재판장에 서게 되고 수용할 수 없는 판결을 받지만, 이는 사건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재판관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내린 묘책이었다.
‘백이와 목금’의 <정 진사, 산송에 휘말리다>에서는 백이의 아버지인 정 진사 문중 땅에 범장(犯葬)을 한 김 생원이 외지부(外知部)를 내세워 묘 주인을 판결해달라는 소장을 낸다. 범장한 묘에 미리 가본 백이와 목금의 지략으로 사또는 진실을 볼 수 있었고 현명하게 판결한다.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의 <송사를 없게 하라, 사무당(使無堂)>에서는 전라남도 순천의 낙안읍성 관아 동헌의 편액 “사무당(使無堂)”을 소개한다. 사무당은 공자의 “송사를 처리함은 나도 남과 같겠으나, 반드시 송사함이 없게 하리라.[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의 뜻으로 수령이 업무를 보고 재판도 하는 공간인 동헌에 알맞은 선언이자 당위인 편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