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어낸 이야기라고도 하는데 정치판에선 꽤 알려진 일화가 있다.
과거 스탈린이 후임자인 후르시초프에게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하나씩 읽어 보라’며 3개의 편지를 건넸다.
취임 후 처음으로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 후르시초프가 첫 번 째 봉투를
열었더니 ‘전임자를 깎아내리고 공격하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우스갯소리로 치부하기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정치사를 살펴봐도 취임 후 전임자 흔적 지우기에 공을 들인 후임자들의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임자들이 추진하거나 계획을 세웠던 정책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우선 백지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경우는 전임자들의 공적이 뚜렷할수록 심했는데, 앞서 언급한 우스갯소리를 음미해 보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최근 치러진 지방선거 이후 신선한 소식 하나가 주목을 받았다.
이정선 광주시교육감 당선인이 장휘국 교육감의 역점 정책을 계승 발전시키기로 했다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이 당선인은 지난 6월 8일 광주시 북구 오치동 광주교육연수원 내 광주시교육감직 인수위원회 브리핑룸에서 당선인 직속 미래교육특별위원회 위원 및 정책을 발표했다.
미래교육특위 10여 개 분야에서 특히 눈길을 끈 부문은 노동인권교육, 역사교육, 민주시민교육 등이다. 모두 장휘국 교육감이 그동안 추진해온 정책 분야다.
당시 인수위 관계자는 “이들 분야는 당선인이 장휘국 교육감의 정책에 공감하고 계승하려는 의미가 있다”라며 “전임자들의 정책을 무조건 배척하는 정치권 관행과 달라야 한다는 이 당선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당선인은 발표에 앞서 장 교육감과 면담을 하고 정책 계승 의지를 전달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장 교육감에게 “좋은 정책을 계승하고 변화가 필요한 부문은 손질하겠다”라며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이에 장 교육감은 “교육감직 인수에 차질이 없도록 돕고 인사·예산 업무에서 협력하고 협의하겠다”라고 화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무조건 전임자들의 정책을 폐기하고 실패한 정책으로 몰아가야 자신의 치적을 내세울 수 있다는 잘못된 정치 관행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좋은 선례여서 소개해 봤다.
반면 얼마 전 막을 내린 문재인 정부의 경우는 이와 사못 다르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문재인 후보가 탄핵당한 전임자로부터 가장 반대쪽에 있던 후보였기 때문이다. 집권 후 문 정부는 적폐청산의 기치 아래 이전 정부의 모든 것과 반대로 가는 국정 기조를 내세웠다. 정책 노선은 물론, 국정 방식, 정치 전략 등에서도 전임 박근혜 대통령과 정반대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신임 현직자가 실패한 전임자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다만, 그 교훈을 얻지 못하고 오용(誤用)한다면 실패의 전철을 답습할 수밖에 없다. 결국엔 50~100년 집권을 호언장담하다 5년 만에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박 전 대통령의 실패 원인 중 하나로는 소통 부재를 들 수 있다. 한때 ‘선거의 여왕’으로 불릴 만큼 유권자의 지지를 얻었으나 대통령이 되자 반대편은 물론 일반 국민, 심지어 소속 당 정치인들과도 소통의 문을 닫았다.
청와대에 칩거하며 소수 측근에게만 의지한 채 언로(言路)를 막았다. 국정 운영 방식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는 가운데 수백 만의 시민이 촛불을 들고, 국회에서 탄핵이 논의돼도 여전히 독선적 불통의 자세를 견지했다.
소속 당이 국회 다수의석을 가졌음에도 탄핵이 압도적으로 의결된 것은 소속 당의 정치인들과도 소통하지 않은 독선 탓이었다.
문 전 대통령 역시 이러한 전임자의 실패 원인을 잘 알고도 그 교훈을 부분만 실천하거나 오용하는 바람에 결국 같은 길을 걷고 말았다. 소통을 소속 당 정치인들과 지지 세력으로만 좁혀 추구하고, 반대편은 물론 중도적 시민에겐 소통의 문을 열지 않고 아꼈다.
전임자가 내부 분열로 무너졌다는 점만 주목해, 지지 세력이 좋아할 수사(修辭)로 그들을 단결시키고 동원하는 데만 주력했다.
조국 전 장관 사태와 같은 위기가 발생해도 문제임을 선뜻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진영 결집의 계기로 삼았다. 문제에 대한 비판은 이분법적 진영 논리 프레임을 씌워 무력화하려 했다. 반대 측 정치인은 물론 일반 국민의 순수한 쓴소리에도 진정성 있는 반응을 보이는 데 인색했다.
상대편은 무시하고 자기편만 바라보는 ‘전략적 극단주의’는 비판이 강할수록 반사적으로 더 경직되는 경향이 있다. 상대를 무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심지어 악(惡)으로 규정함으로써 자기 진영의 문제를 덮고 내부 기율을 단속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실례로 당시 검찰이 ‘정치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던 과거와 달리 독립적·주체적으로 권력 핵심의 부당한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하자 대통령 측은 검찰을 적대시하며 직제 변경 및 권한 조정을 통해 조직 자체를 위축시키려고 시도했다. 이 때문에 정치 검찰의 오명을 벗자는 원래의 개혁 명분이, 진영 수호의 전략적 극단주의 때문에 폄훼·희생되고 말았다.
전략적 극단주의는 자기 진영을 뭉치게 하는 대신 국가를 양쪽으로 분열시킨다. 이미 전환기적 조류로 사회·문화·경제 여러 측면에서 양극화가 심해졌는데, 만약 대통령이 전략적 극단주의에 의존한다면 국가 전체가 과도한 양극적 대결에 빠지게 된다. 이는 국민 모두의 최고 대표자인 대통령에게 맞지 않는 일이다. 대통령은 정파 지도자로 머물러선 안 된다.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전략적 극단주의에 의존했다 하더라도 선거 후 국정 운영에서는 지지층이 아닌 국민 모두를 쳐다보며 어떻게든 사회 통합을 이루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는 기초·광역지방자치단체 등 지역 정가에도 적용되는 셈법이다.
전임자가 애써 노력해 추진 중인 좋은 정책들이 후임자가 들어서자마자 어느새인가 뒷전으로 사라지고 만다. 뿐만이 아니다. 반면교사로 삼지 않고 전임자의 실정을 부각하는 데 과도한 노력을 기울이기까지 한다.
안동시의 예를 들어보자. 초대 민선 안동시장으로 선출된 정동호 전 시장의 역점 시책 중 하나였던 안동댐 일대 영화세트장 설립사업은 지금까지도 아쉬운 정책으로 회자 중이다.
당시 정 전 시장은 한국방송공사 및 영화인협회와 더불어 안동댐 일대를 삼국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대규모 영화촬영세트장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 중이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배우이자 일세를 풍미했던 김지미씨가 영화인협회장으로서 안동을 수차례 방문하며 적극적으로 나선 터라 영화세트장 건립이 목전에 온 듯했다.
영국 여왕이 다녀간 후 전국적으로 유명세가 커지고, 수많은 고찰과 명승지가 산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무르는 관광지가 아니라 스쳐 가는 관광지에 그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던 정 전 시장이 오랜 고심 끝에 내놓은 회심작이자 야심 찬 계획의 결실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정 전 시장은 영화세트장이 건립될 경우 연간 수백만 명의 엑스트라 동원 등에 따른 안동시민의 참여로 다양한 일자리 창출은 물론 지역경제 활성화를 내다봤다. 또 촬영장 및 인기연예인들을 보고자 방문하는 대규모 관광객들을 위해 영화세트장을 포함한 안동댐 일대를 모노레일로 관광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까지 구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계약을 목전에 두고 3선에 실패하면서 이 사업은 흐지부지 무산되고 말았다. 그나마 안동호에 설치됐던 한국방송공사 인기 장편 드라마 ‘태조왕건’의 해상 세트장도, 육상 세트장도 언제부터인가 모두 철거됐다.
물론 이후 안동댐 일대에 유교문화단지가 조성되긴 했으나 여전히 아쉬움이 많았던 사업이었다.
부디 이번 지방선거로 새롭게 지자체장으로 취임하거나 재선에 성공한 이들은 오직 지역민들을 먼저 염두에 두고 전임자의 정책 중 좋은 정책을 가려 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방면의 모습으로 사는 세상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제도가 생겨나고 또 사라진다. 역사란 이런 것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다. 한 인간이나 어떤 정당이 한순간에 뒤집고 없앨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 ①항과 ②항에 그 답이 있다.
<</span>허언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