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돋이 고생길에 나서거나 혹은 올해는 기필코 담밸 끊어야지 하며 모두가 신년 계획을 세우느라 부산을 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해의 중턱을 넘어서고 있다.
빠른 세월을 유수에 빗댄 선인들의 영명함(?)에 그저 고갤 끄덕이면서도 오는 여름이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은 불볕더위 탓만이 아니라 아마도 성하의 문턱에서 연이어 발생한 불미스러운 사건들 때문이리라.
코로나에 열대야까지 무엇 하나 시원한 구석이 없는 요즘, 안타까운 살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지역 분위기가 말이 아니다.
지난 4일 새벽 안동시 옥동에서 사소한 말다툼 끝에 벌어진 칼부림으로 24세의 청년이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뒤이어 5일엔 아침 출근길에 나선 안동시청 소속 여성 공무원이 동료가 휘두른 흉기에 생을 마감해야 했다.
살인에 이르기까지의 정확한 경위나 동기는 조사가 끝나 봐야 알겠지만, 그 어떤 사정이나 과정도 살인을 정당화할 순 없다.
허무하게 스러져간 주검들을 보면서 불현듯 안타까움도 분노도 살아있는 자의 사치스러운 감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듦은 왜일까.
그저 나만의 편견이겠거니 스스로 위로해보지만 여기저기 떠도는 알맹이 없는 숱한 얘기들이 매양 공허하게만 여겨진다.
가정이나 공적 분야에서의 인성교육 부재, 물질만능주의적 사고의 팽배, 한탕주의의 확산 등 도덕성을 훼손하는 다양한 사회구조 변화에서부터 원인을 찾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위에 언급한 사건에서 보듯 최근 들어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일명 분노조절장애자들이다.
이들은 타인들이 자기 심기를 건드렸다고 폭언, 폭행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대부분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애적 성격장애자’들이다. 데이트 폭력을 일삼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차 앞에 끼어들기를 했다며 분노를 주체하지 않는다. 끝내 살인마저도 불사하기에 이른다.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속담이 있다.
참을 인(忍)자는 칼날 인(刃)자 아래에 마음 심(心)자가 놓여있다.
조심하지 않으면 가슴 위에 놓인 칼에 다칠지도 모를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형세가 위중할진 데 누군가 못살게 군다고 이에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가 있을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도 없을뿐더러 움직여봤자 자신을 상하게 할 뿐, 화가 나도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일 것이다.
이처럼 참을 인(忍)자는 참지 못하는 이에게 우선 피해가 일어남을 경고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또 다른 가르침도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온갖 불순한 것들이 자라고 있다. 증오와 분노, 탐욕들이다.
이런 것들이 싹틀 때마다 마음속에 담겨 있는 칼로 단숨에 잘라내 버리라는 것이다.
유사한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언론 매체는 물론이거니와 말깨나 한다는 식자들은 ‘인륜 부재의 인명 경시 풍조 만연’ 운운하며 변변한 해법 없이 화려한 말솜씨를 자랑하기에 바쁘다.
잊을만하면 되풀이되는 대형 참사에 대한 대응도 별반 다름이 없다.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진 오래전의 이리역 열차 폭발사고나 대연각 호텔 화재사고에서부터 와우아파트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대구 상인동 지하철 가스폭발사고, 성수대교 붕괴사고, 수차례의 KAL기 피랍 및 폭파사고.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등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에 걸쳐 수많은 대형 참사로 인해 억울한 주검들이 발생했지만 사고 경위를 전하는 언론의 시각이나 정부, 관계기관의 대처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선 호롱불을 쓰던 그 시절이나 최첨단 디지털 시대를 자랑하는 요즘이나 사고에 대한 인식 및 처리가 어쩜 그리도 변함이 없는지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최선을 다해 슬기롭게 재난을 극복해나가거나 혹시 모를 참사나 사고에 대한 예방 대책 없이 여론의 비난이나 뒤따를 문책만을 걱정하며 이를 비껴가려는 안일한 자세의 관계기관은 엄청난 참사를 유발한 범인 또는 원인 제공자와 그다지 다를 바 없다.
사제폭발물 사고로 차량 내부가 화염에 휩싸였지만 46명의 승객이 다쳤을 뿐 다른 객차로 불길이 옮겨붙지도 않았던 지난 1995년의 미국 뉴욕 지하철 사고는 이런 연유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며 한편 곰곰이 되짚어볼 만한 선례이다.
우리처럼 남의 비극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관심하게 넘기지 않고 외국의 참사나 사고마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사전에 재난을 예방하자는 그들의 철저한 안전의식이 부러울 뿐이다.
안전사고나 참사에 대한 우리네 위정자들이나 국민 의식이 이들의 절반만큼이라도 성숙했더라면 그간의 참담한 참사는 우리 기억 속에 없었을 것이다.
사고가 발생하면 다시는 유사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제반 미비점을 보완하고 개선해야 마땅한 데 우리는 그때뿐이다.
사고가 난 연후에서야 허둥지둥 조문길에나 나서는 정치인들도 몇 달 안 가 잠잠해지면 또다시 본연의 밥그릇 싸움에 열중하느라 ‘언제 사고가 일어났던가’하고 지나쳐 버리기 일쑤다.
성금 모금에 바쁘던 언론이나 함께 공분하던 국민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무관심해지고 사고는 어느새 일상에 파묻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
이제는 정말 이 같은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야 할 때이다.
정치개혁도 시급하지만 사건 사고 없이 평화롭고 이웃 간에 따뜻한 인정이 넘치는 사회, 국가를 바란다면 인간성 회복 운동이 선행돼야 한다.
물질 만능 의식이 팽배해지면서 독버섯처럼 급증하고 있는 정신박약형 현대인들, 극도로 황폐된 도덕성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이 같은 구조적 모순들을 이대로 방임하고선 제대로 정립된 국가는 기대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