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놋다리밟기는 안동 지역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여성들만의 민속놀이로 ‘놋다리놀이’ 또는 ‘기와밟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놋다리밟기는 고려 후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노국공주를 데리고 안동 지역으로 피난을 와 개울을 건널 때 마을의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다리를 놓았다는데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안동놋다리밟기는 1984년 12월 29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역사적으로는 고려 31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광주, 충주를 거쳐 안동으로 몽진하여 약 70일 동안 머물게 되었다. 공민왕 일행이 안동에 들어올 때는 초겨울이었는데, 소야천(솟밤다리)에 다달아 다리가 없는 큰 내를 건너기 위해 왕과 노국공주(왕후)는 신발을 벗어야 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주민들이 너도나도 나와서 허리를 굽혀 다리를 만들고 노국공주가 주민들의 등을 밟고 건너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때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노국공주의 심정을 노국공주 독백형식의 연극을 선보임으로써 놋다리의 유래를 다시금 알리고 무형문화재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놀이문화다.
놋다리밟기가 1984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거의 30여년이 지났다. 지금까지 놋다리밟기는 행사때마다 축제때마다 안동을 대표하는 공연으로 초대받고 있다. 이 공연에서 주목할 부분이 의상과 노래소리다. 의상은 고증받아 최근에 새로 제작된 고려복장이다. 김경희 보유자의 말을 빌자면 "노래하는 공연단의 복장이 조선시대 한복이다. 이 부분도 다시 개선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공주와 춤추는 공연단의 의상은 그런대로 고증받아 재현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중요한 단원들은 조선시대 복장을 하고 있다. 놋다리밟기 보존회가 30여년 지난 후 시민들에 내놓은 결과물이다.
놋다리밟기 보유자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놋다리밟기보존회에서 보유자가 너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김경희 보유자 본인은 "저도 명예보유자로 물러나려했는데 물러나지 못했다. 회장을 지금 조교나 전수자들 중에서 투표로 선출해서 맡기는 것은 보유자로서 자존심이 상해서 안된다. 그래서 제가 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놋다리밟기보존회에서 자신의 역할이 굉장히 크다고 말한다.
놋다리밟기 보유자의 역할이 조직을 관리하는 역할은 아니다. 보유자는 관리에서 철저하게 멀어지고, 조직을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는 역할은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이 하는 게 좋다. 시에서 보유자 자신도 하고 싶지 않은 조직관리를 억지로 맡겨두고 있다. 안동시는 놋다리밟기보존회를 조직정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현재 놋다리밟기보존회의 회원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고도 한다. 이에 대해 시에 자료를 요청했지만 부실한 자료로 대신했다.
놋다리밟기가 안동을 대표하는 놀이문화재가 될 수 없다. 놋다리밟기는 원래 다산과 풍요를 바라는 데에서 시작됐다. 지금은 놋다리밟기 '노국공주'선발대회에 관심이 집중이 되어 있다. '놋다리'하면 '공주'가 생각난다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다. 또, 놋다리밟기 노래가 있는데, 근본이 민요인지 동요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거기에다가 놋다리밟기 노래를 부를 때에는 조선시대 한복을 입고 대충 공연을 해왔다는 것도 놀라운일이다. 이런 형편인데 안동을 대표해서 타지역에 공개해서는 곤란하다.
놋다리밟기 놀이 무형문화재가 다음 세대로 전수될 수 있는 가치는 전통복장의 재현, 노래의 근원을 제대로 복원하는 데에 있다. 처음 김순념할머니가 부르던 노래와 현재의 노래는 판이하게 다르다. 시에서 문화재를 관리하는 업무에 더 많은 애정을 기울여야 한다.
놋다리밟기 놀이문화재는 안동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공주의 외모가 전부인 현재의 공연은 본질을 비껴가고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