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은 올가을 들어 가장 추워 서울을 비롯한 내륙 곳곳에서 첫얼음이 관측됐다는 소식이다.
하긴 지난 9월 하순 이미 강원도에서 첫서리가 내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상강 : 양력 10월 23일 경으로, 아침과 저녁의 기온이 내려가는 때
조석으로 공기가 제법 차다고 생각했는데 가을이 어느새 한층 깊어졌음을 느낀다. 그러고 보니 상강(霜降)이 며칠 남지 않았다.
본시 상강은 24절기의 열여덟 번째로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에 든다. 가을의 마지막 절기이기도 하다.
24절기는 기본적으로 태양 궤도인 황도의 움직임을 기본으로 정해짐으로 양력 날짜에 연동된다.
상강은 태양의 황경이 210°인 날로 대개 양력 10월 23일 무렵이다.
낮에는 쾌청하나 일교차가 심하고 밤에는 온도가 급강하하면서 서리가 내린다. 장소에 따라 이른 얼음이 얼거나 눈이 내리는 때도 있다.
산에는 단풍이 절정을 뽐낸다.
옛사람들은 한로 후 15일간을 닷새씩 끊어 3후(候)로 나눠서 기러기가 초대를 받은 듯 모여든다고 했다. 또 참새가 줄고 조개가 나돌며, 국화가 노랗게 핀다고 표현했다.
국화꽃 향기가 제법 그윽해지면서부터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던 기온이 이즘엔 더욱 내려가니 늦가을 서리를 맞기 전에 콩, 팥, 조, 수수, 그리고 벼의 추수를 끝내려는 농부의 손길이 절로 빨라져, 농촌 들녘은 정신이 없다.
새벽밥 먹고 들에 나가 밤이 늦도록 일을 한다. 된서리 내리는 상강이 머잖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24절기를 정해 계절의 구분을 뚜렷이 해 이를 영농에 도입한 옛사람들은 참으로 영명한 과학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24절기, 즉 24기는 태양의 황도상 위치에 따라 특징지은 계절적 구분을 일컫는다.
중국력법은 달의 위상변화를 기준으로 역일(曆日)을 정해 나가는데, 이것에 태양의 위치에 따른 계절 변화를 참작해 윤달을 둔 태음태양력이었다.
그러나 이 역법으로는 계절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아 특별한 약속하에 입춘∙우수∙경칩∙춘분 등 24기의 입기일(入氣日)을 정한다.
그 정하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평기법(平氣法)이고, 다른 하나는 정기법(定氣法)이다.
예전에는 장구한 세월에 거쳐서 평기법을 써왔다. 이것은 1년의 시간적 길이를 24등분 해 황도상의 해당하는 점에 각 기를 매기는 방법이다.
동지(冬至)를 기점으로 해 순차적으로 중기∙절기∙중기∙절기 등으로 매겨나가는 방법이다.
따라서 동지의 입기 시각을 알고 이것에 15.218425일씩 더해가기만 하면 24기와 입기 시각이 구해진다.
정기법은 한참 뒤 늦게 실시됐다. 문헌에 따르면 6세기 반 경에 북제(北齊)의 장자신(張子信)에 의해 태양운행의 지속(遲速)이 발견된 후, 수(隋)의 유탁(劉倬)이 정기법을 쓸 것을 제창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1천 년 이상이나 방치됐고, 청나라 때 서양 천문학에 의한 시헌력(時憲曆)에서 처음으로 채택됐다고 한다.
각설하고 평기법에 의한 24기는 신통하게도 영농일정과 딱 맞아떨어진다.
추분을 지나면서 벼 이삭 소리가 슬슬 서걱거리고 곡식과 과일이 결실을 보는 한로가 다가오면 북에서부터 남으로 내려오는 벼들의 황금빛 물결에 맞추어 벼 베기가 시작된다.
또 단풍은 춤추듯 그 붉은 자태를 뽐내기 시작하며 하늘은 더없이 맑고 높아져 간다.
벼가 여물어 들판이 황금 물결로 출렁일 때 농부들은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벼를 베거나 타작하는 날은 마치 잔칫날처럼 부산하고 고될망정 수확을 하는 농부의 얼굴에는 웃음이 넘친다.
예전엔 길손이 지나면 꼭 불러 새참이나 점심을 함께 권했고, 막걸리 한 사발이라도 돌려먹을 줄 알았다.
가을 추수가 끝나기 무섭게 이모작 지대인 남부지방에서는 보리 등 여타 작목의 파종에 들어가야 하는데, 늦어지면 동해(凍害)를 입을 우려가 있고 수확량 또한 급감한다.
또 이듬해 영농에 차질이 빚어지는 등 악순환이 계속되는 탓에 농가에서는 이 시기를 놓칠까 봐 발을 동동 구르기 일쑤다.
그러나 요즘엔 또 다른 이유로 농민들이 발을 구르고 있다.
젊은이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고 고령의 노인들만 남아 수확기만 되면 일손 부족으로 농촌 곳곳마다 애간장이 탄다.
특히 매번 가을걷이가 시작되는 한로가 가까워질 때면 일손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올해 역시 안타깝게도 애써 지은 농사를 제때 수확하지 못해 벌써부터 농심이 타들어 가고 있다고 한다. 상강이 지나면 금방 입동, 소설이 닥치고 이 시기엔 또 이때대로 겨울나기 준비에 바빠질 터이다.
농가월령가에 ‘들에는 조, 피 더미, 집 근처 콩, 팥 가리, 벼 타작 마친 후에 틈나거든 두드리세’라는 구절이 있다.
가을걷이할 곡식들이 사방에 널려 일손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노래한 것이다.
또 속담에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 ‘가을 들판에는 대부인(大夫人) 마님이 나막신 짝 들고 나선다’라는 말도 있다.
쓸모없는 부지깽이도 필요할 만큼 바쁘고, 존귀하신 대부인까지 나서야 할 만큼 곡식 갈무리로 바쁨을 나타낸 말들이다.
이번 상강에는 모두가 들녘으로 나가자. 타들어 가는 농심을 진정시키고 모두가 한바탕 크게 웃을 수 있도록 일손을 보태자.
저녁이면 붉은 노을과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그리운 곳, 까치밥으로 남겨 둔 붉은 감이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인정이 넘치는 그곳, 영원한 우리네 마음의 고향이다.
가족과 이웃을 데리고 들녘으로 한번 나가보자. 그리고 허리를 굽혀 벼도 베고 벼 이삭도 주워보자. 도시의 찌든 삶을 훌훌 털어 버리고 대자연 속에서 심호흡도 해보자.
지긋지긋한 정치판 얘기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뿐더러 어려운 농촌도 돕고 우리 건강에도 좋으니 그야말로 일석삼조가 아닐까 싶다.
<</span>허언거사>